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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니미 아키라 X 히나타 쇼요

​소금 꽃

   “아키라.”

   “응?”

   “그냥 불러봤어.”

   그냥 부르기를 십 분 사이에 세 번째. 이만하면 의도적이다.

 

   “아키라?”

   “왜.”

   “아키라-.”

   “한 번만 더 불렀다간 부를 때마다 뽀뽀 한 번이야.”

   “쿠니미 씨?”

   치사하게 아키라가 아니라 쿠니미 씨라 부르면 뽀뽀하지 않아도 되는 줄 아나 보다. 히나타 쇼요, 아직도 쿠니미 씨라 하면 자기가 아니라 남인 줄만 알고 돌아보지 않는 배우자님. 이름 쓰는 란에는 매번 히나를 쓴 다음 줄을 긋고 쿠니미라 썼다. 그냥 나 히나타 쇼요로 살면 안 될까? 그럼 내가 히나타 아키라라 할게. 쇼요는 다음에도 그랬다. 쿠니미 아키라. 쇼요, 정신 차려? 싫어.

 

   다행히 아이 이름은 쿠니미라 써줬다. 쿠니미 유우키. 쇼요는 히나타 유우키도 귀여울 거 같다며 자기 실수를 변명했지만 이쪽을 히나타 아키라라 부르지 못한다는 같은 문제점 때문에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름 문제를 뒤로하면 얘가 또 계속 시비를 건다는 현재만 고스란히 남는다.

 

   “쿠!”

   “응.”

   “니미 씨!”

   혹시 얘가 지은 죄라도 있는 건가.

 

   “설거지 안했어?”

   “아냐, 했어.”

   거짓말쟁이. 싱크대에 쌓인 그릇은 설거지거리가 아니라 버릴 쓰레기라도 되나.

   오늘 점심은 맛있는 돈가스였다. 유우키가 햄버그 스테이크가 먹고 싶다고 해서 다진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사왔더니 쇼요가 갑자기 바닥을 굴러다니면서 돈가스가 먹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유우키는 체념한 얼굴로 굴러다니는 엄마를 일으켜줬다. 내 쇼요는 성격이 좋은 건지 더러워졌는지 모르겠어. 결국 다진 고기를 뭉쳐서 계란 옷과 빵가루를 묻혀 돈가스처럼 튀겨주었다. 이게 돈가스는 아니지, 따지자면 햄버그 튀김쯤 되지 않을까. 냉장고에 유통기한이 아슬아슬한 치즈가 남아있어서 돈가스 안에 치즈를 듬뿍 넣고, 겉에도 치즈를 뿌려주었다. 치즈가 녹진녹진하게 올라간 햄버그 가스 완성. 유우키가 착한 아이답게 불평 없이 먹는 동안 쇼요는 또 심통을 부리면서 볼을 부풀렸다. 이거 돈가스 같지 않아. 오늘따라 우리 쇼요가 참 이상하게 구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속이 갑갑하다.

   “내가 돈가스 만들면 얌전히 설거지하기로 했지?”

   “아냐.”

   “왜?”

   “돈가스가 아니었으니까 약속은 무효야.”

   이 좋은 여름날에 쇼요가 삐졌다. 햇살은 쨍쨍하고 하늘은 맑은데 집은 잔잔한 에어컨 소리로 시원한 하루. 그리고 휴일. 일감이 없으면 없는 대로 불안하고 많으면 또 귀찮고. 쇼요는 일이 없을 땐 한가해서 좋고 일이 많으면 돈 많이 벌어서 좋다고 긍정적인 소리를 했다. 난 그런 쪽은 잘 모르겠어. 어쨌든 비교적 스케줄이 자유로운 프리랜서 생활은 즐거웠다. 사실 별로 자유롭진 않다.

 

   쓸데없는 소리는 말아줘. 유우키가 돈가스라 하면 돈가스야. 쇼요를 내버려둔 채 음료를 두 잔 만들었다. 신년회에서 경품으로 당첨 받은 탄산수 제조기는 올해 여름의 일등공신이었다. 간단하게 탄산을 불어넣은 병으로 유리잔 둘을 채운 후 레몬청을 내 것엔 세 스푼, 쇼요 것엔 두 스푼을 넣으면 달달하고 상큼한 레몬에이드가 된다. 그리고 고양이 모양 칸에 얼려 깜찍한 고양이 얼음을 하나씩 넣어줬다. 옅은 노란색 음료 위에서 고양이가 앞발을 들이민다. 연애 전만 해도 무슨 모양, 요리, 그래서 돈가스가 어쩌고 이런 취미는 전혀 없었다. 기껏해야 편의점에서 좋아하는 소금 캐러멜을 사거나 킨다이치가 먼저 주문한 오므라이스를 가로챌 뿐이었는데, 그래서 이럴 줄은 몰랐는데 살다보니 성격이 많이 변하긴 하네. 또 그래서 쇼요의 성미가 좀 까다로워졌다.

 

   “아키라!”

   “마셔.”

   “레몬에이드다! 나 여기에 과자-.”

   과자까지 대령하라는 소리를 하기 전에 빠르게 입을 맞췄다. 뺨이나 이마에 하면 대수롭잖게 무시한다. 그러니 입술에 대고 꾹 눌러서 비벼야한다. 자주 생각하기로, 쇼요는 분명 손만 잡아도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였다.

   쿠니미는 손이 크네.

   좋아하는 아이에게 고전적인 수단을 썼다. 히나타는 까만 바탕에 병아리가 그려진 후드 티랑 청바지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안개가 좀 흐린 날이었다. 우연을 가장해서 카라스노 고등학교가 있는 쪽에 볼일이 있어 근처를 서성였다. 청과상, 정육점, 저쪽 너머엔 아직 비닐을 걷지 않은 포장마차가 한 대. 버스정류장에서 멀어져서 주머니에 손 하나를 넣고 천천히 걷는 동안, 그리고 다른 쪽 주머니에선 소금 캐러멜의 작은 곽이 달그락거렸다. 히나타 쇼요의 애마는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무너졌다. 길가에 잠시 세워두고 내려서 신발 끈을 매는 사이 트럭이 치고 지나갔다는 소식엔 몇 초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래서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었고 트럭 주인이 자전거를 새로 사서 배상했다는 말엔 애꿎은 츠키시마에게 성을 냈다. 겨우 그걸로 사람 죽을 뻔한 일을-. 어찌되었든 히나타는 새 산악자전거 앞에 바구니를 걸고 다녔다. 초록색 라인이 매끄럽게 빠진 가장자리에 체인이 돌아간다. 발자국 소리만, 바퀴 멈추는 브레이커 소리만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쿠니미, 안녕! 응, 안녕. 여긴 무슨 일이야? 볼일이 있어서. 무슨 볼일? 책 사려고. 책? 응, 잡지야. 잡지? 응. 답을 조금씩 던져주자 히나타는 순한 눈을 반짝이며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혹시 야한 잡지야? 아냐. 야한 잡지인 줄 알았어! 우리 반 코노에가 말인데, 야한 책을 교실에 가져와서 혼났거든! 근데 거기서-. 내버려두면 자기 혼자서도 재잘대는 아이.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들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 손금 볼 줄 아는데, 너도 봐줄까?”

   손바닥 위에 작은 손이 얹어졌다. 작은 손, 아무래도 손으로 공을 다루는 스포츠를 하다 보니 모양이 예쁘진 않지만 마디가 꺾이듯이 도드라진 곳이 귀여웠다. 군데군데 굳은살이 든 부분을 어루만져 엄지를 죽 훑었다. 쿠니미? 손 제대로 펴야지 보여. 이렇게. 뒤에서 손을 쥐고 사이마다 깍지를 껴서 펼쳐주었다. 정맥이 가늘게 파란 선을 그린다. 그 위에서 검지로 살갗을 간질였다. 쇼요는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얼굴을 붉힐 뿐 그만하라는 소리만은 하지 않았다.

 

   아키라는 손이 커서 부끄러워.

 

   겨울날이 춥다, 춥다, 하면서 장갑은 홀랑 잃어버린 쇼요가 손이 빨개져서 울상을 지었다. 코트 주머니는 여동생 준다는 군밤과 집에 가서 먹겠다는 과자봉지로 가득 차서 호호 입김만 불어대는 모습이 귀엽고 우스웠다. 그래서 손을 잡았다. 사귀기 시작해서 두 달, 네 손금으로 봐서는 넌 검은 머리 남자를 만나서 결혼할 거란 헛소리를 한지 네 달만의 일이었다. 왼손 장갑을 빼서 쇼요의 왼손에 헐렁하게 씌우고, 오른손을 쥐어 내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쇼요는 주머니에서 소금 캐러멜 하나를 잡고 꼼지락꼼지락 계속 앙탈을 부렸다. 아키라가 나한테 부끄러운 짓을 해. 부끄러워? 수줍어. 수줍다는 말에 이쪽도 뒤따라서 귀가 달아올랐다. 처음이란 게 수줍을 수 있구나.

 

   “우리 뽀뽀할래?”
   “키스.”

   “아직 이릅니다. 뽀뽀만 하자.”

 

   너무한 소리네. 아키라는 나한테 손금 볼 줄도 안다고 했어. 쇼요는 나한테 너무해.

   뽀뽀 한 번도, 입술이랑 뺨이랑 코는 안 되고 이마에만 된다고 한다. 눈을 질끈 감아 속눈썹이 발발 떨리는 위에 입술을 대었다. 왼손에 작은 손톱이 파고든다. 야릇한 아픔에 욕심을 참고 시간을 길게 보냈다. 아키라 입술은 부드럽네. 쇼요는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나 중학교 들어와서 부터는 뽀뽀 받긴 처음이야. 나도 해보긴 처음이야. 아키라는 해봤을 거라고 생각했어. 쇼요는 내게 입을 맞출 땐 있는 힘껏 발돋움을 했다. 발꿈치를 올린 채 벌벌 떠는 널 위해서 난 허리를 숙여 잠자코 이마를 대주었다.

 

   “과자 줘. 어제 사왔잖아.”

   “없어, 유우키가 친구랑 먹었어.”

   “유우키, 엄마 과자-.”

   “유우키 자잖아. 깨우지 마.”

   깊이 잠든 애가 깰까 싶어 다시 입을 막았다. 이번엔 입술을 쓸 것도 없이 혀를 꾹 찌르면 된다. 깜찍한 엄마는 볼이 통통하게 부풀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쇼요는 낮잠 자면 아키라가 뭐라고 하는데, 유우키는 낮잠 자도 된대. 아키라는 치사해. 쇼요도 아키라 애로 태어날걸 그랬어. 괜히 결혼했다가 아키라한테 구박 받아.

   “결혼할 땐 예뻐해 주겠다며.”
   “돈가스 해줬잖아.”

   “돈가스 아니라고!”

   고기를 뭉쳐서 튀기면 돈가스가 아니라 멘치카츠라고 한다. 줄곧 이유 모르게 갑갑했던 목구멍이 후련해졌다. 멘치카츠라는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어. 쇼요는 동네 정육점에서 자주 군것질을 했다. 여기는 크로켓도 맛있거든. 다음에 아키라한테 사줄게!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면 남도 그럴 줄 알아서 꼭 한 입씩은 물려줘 버릇하는 다정함. 그래서 넌 돈가스도 좋아하고 멘치카츠도 좋아하는데 무슨 문제야.

 

   “왜 그래, 응?”

   “몰라. 다 미워. 나 이제 아키라랑 안 놀아줘.”

   놀아달라고 한 적도 없었다. 레몬에이드를 내려놓고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옆엔 간이테이블을 두고 레몬에이드와 소금 캐러멜, 무릎에는 커다란 쿠션에 독서대를 둬서 편하게 잡지를 펼치자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에도 스르륵 눈이 감겼다. 권태기 부부를 위한 특별 데이트 플랜, 두근두근 유월 호. 서장, 사랑하는 자기가 요즘 들어 뜸해진다면? 우리 사이가 뜸해졌나, 아닌가, 요즘 어떻지, 그랬나. 쇼요가 오늘 돈가스를 조르는 이유가 사랑을 시험하기 위해서-. 그냥 돈가스가 먹고 싶었겠지.

   그래도 정 먹고 싶다면 자기가 나가서 사올 텐데. 내 돈가스가 먹고 싶대. 그럼 앞치마만 한 장 입고 팔랑거리면서 부탁할 텐데. 그러기 싫은가보지. 그러기 싫은 이유는 권태기밖엔 없을 텐데. 그리고 쇼요는 앞치마 하나 뿐만이 아니라 메이드 복이나, 고양이 옷을 입고 냥냥거리기나, 예전에 입던 카라스노 그 유명한 10번 유니폼 상의만 입기를 전혀 꺼려하지 않았다. 부족한 상상력이 꼬리를 잇는 동안 이성은 보다 제대로 된 계산을 시작한다.

   난 쇼요를 좋아한다. 쇼요도 나를 좋아한다. 쇼요가 나를 좋아했고, 난 그 전부터 먼저 좋아해왔다. 난 쇼요가 나를 좋아하는 만큼보다 더 쇼요를 좋아한다. 그래도 쇼요는 자기도 만만치 않게 나를 사랑한다 했다.

 

   뛰는 모습이 좋았다.

 

   달리는 모습이 좋았고, 풀죽은 얼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웃을 땐 이상하게 시선이 그쪽으로 가서 힘들었지만 울 때는 그보다도 슬퍼서 열심히 눈물을 닦아주었다. 쿠니미. 아키라라고 해줘. 쿠니미? 나는 널 좋아해. 사귀자. 쿠니미? 싫어? 아니, 저, 쿠니미? 응. 가을날 손에 한가득 단풍잎과 은행잎을 모아올린 쇼요가 너한테 주는 거라며 웃었던 날이었다. 쇼요는 내가 자길 좋아한다 해줘서 좋아지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날 보고 있는 널 좋아했다.

 

   합숙 날 때문인지, 무엇이 이유였는지. 눈을 감고 힘들어하는 내 목덜미에 수건을 얹어줘서. 시원한 음료를 내밀며 격려해줘서. 작은 손으로 서툴게 건넨 팥 캐러멜이 맛있어서. 킨다이치는 내가 팥 캐러멜을 좋아한다고 쇼요에게 잘못 전했고, 쇼요는 기고만장하게 캐러멜 한 상자를 사와서 두어 번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유를 고르다 옆을 보면 곱슬머리가 복슬복슬한 연인이 눈을 깜빡인다. 아키라, 아키라, 쇼요 봐줘, 아키라. 쇼요 미워. 아냐, 거짓말이야. 정말 좋아해.

 

   “아키라?”

   “응.”

 

   청혼은 쇼요가 했다. 공원에서 함께 마지막 남은 팥 오방떡을 나눠먹다 말을 꺼냈다. 우리 결혼하자. 어차피, 언젠가 결혼하겠지, 그래서 함께 살겠지 어렴풋이 생각해온 날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프러포즈를 들을 줄은 몰라 입이 막혔다. 지금 오방떡 먹다 나온 결혼 얘기야? 우리 결혼은 오방떡 먹다가 시작해? 차라리 이것보다 비싼 타코야키로 해주지, 왜 하필 오방떡이야.

 

   쇼요는 오방떡을 먹던 내 옆모습이 유난히도 예뻐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이 하고파서 말을 꺼냈다고. 결혼이……. 남들은 예쁘다고 결혼해? 얘는 그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네 생일은 내일이다.”

   “아.”

   “착각한 건 아니지?”

   “어, 응, 아닌데, 그게, 어, 그래서, 어, 생일 전야잖아?”

   밖엔 해가 쨍쨍한데.

   유우키 방에서 소리가 들린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너무 오래 자두면 이따 밤을 샐 테니까 깨우려 한 참이었다. 쇼요는 설거지를 하지 않았고, 나도 귀찮으니 오늘 저녁은 외식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하자. 쇼요는 거기서 매번 유우키의 어린이 정식을 보고 엄마 새우튀김이랑 네 볶음밥에 꽂힌 만국기랑 바꾸자, 지금은 특별히 방울토마토도 줄게, 하고 칭얼거렸다. 자기 싫은 방울토마토를 선심 쓰는 양 몰래 넘기려고 하다니 참 뻔뻔하지. 물론 유우키는 만국기를 끝까지 갖고 있다가 집에 들고 돌아가곤 했다. 특별히 아이의 생일에는 어린이 정식을 두 개 시켜서 만국기도 두 개 꽂아주었다. 쇼요도 자기 생일엔 만국기, 만국기, 울어댔는데…….

 

   유우키는, 우리 아인. 사과.

 

   전에, 예전에. 쇼요는 사과가 먹고 싶다며 특별히 빨갛게 예쁜 호노카를 세 개나 가져와서 과도로 두드렸다. 그러다 손이 벨 게 겁나 과도를 뺏어들자 당당하게 토끼모양으로 깎아달라는 명령을 했던 저녁 무렵, 봄은 아직 해가 일찍 저물어 어두웠지만 겨울과 다르게 은은한 풀 냄새가 열린 창문을 타고 들어와 포근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날이 따뜻할 거라 했지. 쇼요는 토끼가 접시에 놓이는 족족이 자기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들여온 사과는 우시지마 씨를 통해서 그쪽 친척한테 저렴하게 구입한 품질 좋은 호노카였다. 우시지마 씨는 쇼요와 나름 친해서 가끔 쌀이나 콩, 전통주 등을 잘 주셔서-. 어쨌든 공식전에서 만난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텐도 사토리나 고시키를 포함해서 전부 싫었지만 지금은 좋은 사람이라, 어쨌든 아직 꺼려지지만. 설에 받은 쇠고기는 정말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쇼요는 매일 사과를 여러 개 먹으면서 자기 피부가 좋아진다는 자랑을 했다.

 

   그래서 나 임신했어. 네? 쇼요 임신했습니다.

 

   슬슬 아이를 갖고 싶었고, 그래서 그 날마다 열심히 거사를 치러서-.

 

   엄마는 사과를 많이 먹었다. 쇼요가 임신했어. 내 예쁜 쇼요가, 쇼요의 예쁜 아키라한테, 그래서, 우리가……. 그 해 자기 생일날 쇼요는 내가 왜 케이크를 먹지 못하냐면서 바닥을 굴러다니다가 소파 다리에 머리를 찧었다. 아키라, 나 서러워! 왜 나만 못 먹어? 아키라도 먹지 마! 그래서 우린 사이좋게 팥 캐러멜을 나눠먹었다. 쇼요는 꿋꿋하게 캐러멜을 젓가락으로 후벼 파서 초를 꽂아 불을 붙였다. 이제부터 이게 우리 생일 케이크라고 하자.

 

   아이는 또래에 비해서 키가 빨리 자랐다. 요즘 좀 먹나 싶어 볼이 통통해지면 곧 팔다리가 죽 길어져서 다시 볼이 홀쭉해지고, 또 옷을 사주면 다시 끝이 처량해져서 빨리 새 옷을 사야했다. 지금 입고 있는 파자마도 분명 손 한 뼘은 헐렁하던 사이즈였는데 어느새 발목에 밑단을 접은 자국이 사라졌다. 키는 아키라를 닮아서 다행이다. 쇼요의 안도처럼 아이는 쇼요와 달랐고, 웃을 때 패는 보조개나 순한 눈매는 꼭 닮았다. 유우키는 발을 질질 끌며 옆에 앉아 캐러멜을 하나 가져갔다. 우리 아가가 졸린 눈을 비비면서 비닐 껍질을 설렁설렁 까고 있어서 미리 까둔 하나를 입에 물려주자 쇼요처럼 밝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닮았어, 너도 크면 참 예뻐질 거란다.

 

   “유우키, 일어났어?”

   “엄마가 또 아빠 괴롭혀.”

   “안 괴롭혔어. 아빠랑 엄마는 그냥 장난쳤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쇼요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 웃음에 가소롭게 꾸며낸 티가 역력하다. 저는 무해합니다. 쇼요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키라가 해도 된다고 했어요. 아키라가 나빠, 다 아키라 탓이야. 춤추면서 설거지하다가 접시를 깨먹었던 날에도 쇼요는 겁에 질린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키라가 노래를 못하게 해서 그래. 아키라 탓이야. 짜증나지만 노래를 부르면서 해도 된다고 했더니 정말로 혼자 'It's a hard-knock life‘를 완창하며 설거지를 깨끗이 해내었다. 거짓말 사이에 몰래 사실을 담고, 그러니까 네가 나쁘다고 빽빽 울어댈 땐 잠자코 지켜보면 된다.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라 혼자 퐁 터져버려 아키라, 아키라, 하고 다시 순해지기 일쑤라서.

 

   “엄마가 아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 엄마는 아빠가 첫사랑이야!”

   “그게 왜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는데?”

   “어, 그, 나도 몰라.”

   “엄마는 가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아이가 얄미운 소리를 하자 쇼요는 새끼손가락으로 뺨을 콕 찔렀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란다. 네 엄마는 만날 이상한 소리를 해. 이 말을 꺼내면 쇼요의 손톱이 이쪽을 향하겠지. 이번엔 봐주는 거 없이 바짝 날을 세워서-. 얼굴이 상해버리면 쇼요가 놀려댈 테니 그러지 않았다. 대신 아이를 끌어당겨 이쪽에 두고 자기 엄마와 멀리 떨어지게 했다. 여전히 예전처럼 귀여운 얼굴로 날름 혀를 내민다. 부럽지? 부러우면 나처럼 좋은 사람 만나라! 히나타 씨는 카라스노 배구부 주장시절에도 비슷하게 유치했다. 후배들 있는 앞에서 내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널 밟아 쓰러뜨리겠다는 외침엔 응원하러 온 이와이즈미 선배와 그쪽 사와무라 씨까지 아연해져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냥 우리가 사귀어서 그래요. 그리고 당시의 자신도 만만치 않게 뻔뻔했다. 지금은 배우자 생일 잊어먹은 나쁜 놈이라는 오해에 펄떡 뛸 만큼 기가 막혀 해도.

 

   “엄마를 괴롭히면 못 써. 엄마는 아빠만 괴롭힐 거야.”

   “야!”

   날렵한 뒷다리가 내 종아리를 걷어찬다. 너무 아프지 않을 곳만 걷어차 준 배려에 감사하며 쇼요랑 발만 갖고 토닥거렸다. 모양이 예쁘게 잘 빠진 다리는 애석하게도 길이가 부족해서 이쪽이 유리하다.

 

   어쨌든 오늘 억울한 사람은 나야. 하루 종일 부루퉁한 널 성심성의껏 상대해줬건만 그 이유가 혼자 자기 생일을 착각해서였다면, 이번엔 내가 좀 삐져버려도 되잖아. 토라진 척 발을 치우고 고개를 돌리자 쇼요의 발가락이 내 것을 살살 간질였다. 아키라아, 아키라아, 화나쪄? 쇼요한테 화나쪄? 아이 달래는 목소리로 혀 짧은 말투로 소곤소곤 다가오면 어쩔 수 없었다. 귀가 달아올라서 화끈거리는 속으로 쇼요의 음성이 민감한 곳을 건드린다. 아키라, 미안해. 아키라아, 사랑해. 쇼요가 아키라 생일 땐 엄청 좋은 선물 해줄게. 아키라 하라는 대로 다 해줄게! 상상과 같이 발가락이 발등을 타고 올라와 발목 근처를 문질렀다. 이따금 발톱에 긁혀 날카로운 아픔이 기분 좋게 나를 놀려댔다. 아무리 고민해도 얘는 처음엔 이런 애가 아니었는데, 대체 내 어디에 무슨 문제가 있어서 순진하던 히나타 쇼요가 요령 좋은 쿠니미 쇼요 씨가 되어버린 걸까. 저기이, 미안, 으응? 미안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백기를 들어버렸다. 이제 됐어, 너 좋을 대로 지지고 볶아서 먹어치워.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는 약속도 됐으니까 내 생일에 하라는 대로만 다 해줘. 그럼 쇼요는 또 좋다면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달려들었다.

 

   아빠는 엄마보다 똑똑한데, 가끔 엄마보다 바보 같아. 유우키도 크면 알게 될 거야. 내가 네 엄마 이기는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본 적 없어. 탐욕스럽게 승리를 먹어치운 쇼요는 아이한테 괜한 소리 하지 말라며 머리를 두들겼다.

 

   “아빠 나 배고파!”

   이번엔 쇼요한테 밥하라고 할까. 유우키가 맛없다고 해서 쇼요가 또 삐진다. 좋아, 아까 정한 대로 외식하자. 유우키랑 쇼요가 좋아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패밀리 레스토랑 가자. 오늘 저녁은 외식이야.”

   “와!”

   “쇼요한테도 특별히 어린이 정식 사줄게.”

   “아키라 사랑해!”

   오늘은 엄마도 만국기가 있어. 엄마도 유우키처럼 만국기 갖고 놀 거야! 쇼요가 앞서서 팔짝팔짝 뛰어올라봤자 유우키가 옷을 갈아입어야 나간다. 아이가 이를 닦고 세수하러 간 사이에 쇼요는 가서 어린이 정식과 별도로 주문할 메뉴를 벌써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설거지를 하면 얼마나 편하겠어. 왜 애보다 네가 더 좋아해? 나 어린이 정식 먹어보고 싶었어! 되게 재밌어 보이잖아! 결혼기념일 날 데려갔던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저런 얼굴은 아니었다. 그런데 기념일을 잊으면 잊었다고 울면서 싫어하고. 쇼요는 내 생일마다 새벽 동틀 무렵에 머리맡에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아키라가 태어난 날의 태양이 뜨고 있어! 저거 봐봐! 아키라, 아키라의 해야! 그냥 아침에 억지로 일어나서 짜증내는 내가 보고 싶을 뿐이잖아. 쇼요는 가끔 심술궂다.

 

   오늘은 내가 유우키 만국기도 가질래! 엄마 나빠! 엄마는 나쁘지 않아요. 엄마보다 네 아빠가 더 나쁩니다. 그런데 엄마가 더 나쁘잖아!

   꼭 애한테 말을 저렇게 해요. 그래도 결국 유우키가 만국기 두 개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겠지. 쇼요는 졌다는 식으로 침울하게 발을 구를 테고. 쇼요, 내 예쁜 쇼요. 뭐라 해도 끝엔 상냥해져서 설거지를 하고 오늘 투덜대서 정말 미안하다며 뺨을 비빌 쇼요. 아이는 모처럼 하는 외식이라 자기가 아끼는 까만 셔츠를 입고 튀어나갔다. 그 뒤를 따라가면서 같이 들뜨는 대신 찻길 조심해라, 뛰지 마라, 충고하는 역할은 우리 몫이다. 저것 봐, 뛰는 모습이 널 닮았어. 왼다리가 좀 더 밑으로 꺾이거든. 꼭 아키라야. 웃는 얼굴에 눈을 마주치면 입꼬리가 올라갔다. 언제나 거침없이 해맑은 말소리가 곁을 두드렸다.

   “자기야?”

   “왜.”

   “미안!”

   실은 전혀 미안하지 않으면서 그런 척만, 이런 척은. 손을 내밀자 손이 잡혔다. 작고 짧은 손가락의 사이사이에 깍지를 끼우며 손등을 쓰다듬었다. 아키라는, 손이 커서 멋있어. 지금도 그렇게 말해줄까.

   뺨이 붉어져서 노을을 올려다보던 아이가 있었다. 한참 그 자리에 서서 하늘만 보는 모습이 이상해 가까이 가보면 그게 히나타 쇼요였고, 히나타 쇼요라는 이름을 알기 전에 제왕님한테 바락바락 달려들던 한 중학교 배구부의 주장이란 사실만 알았다. 왜 굳이 시선이 갔는지, 남의 일은 내 일도 아니었을 텐데 또 하필 네가 보는 하늘이 궁금했는지는, 거기까지 생각하면-. 감정, 그래서 사람의 마음이, 먼 하늘의 석양은 보이지만 애정이나 사랑의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며 변명하는 수밖엔 없었다. 그렇게 그 아이와 눈이 마주쳤고, 한창 수험 중이던 히나타 쇼요는 소금 캐러멜 상자를 들고 있던 쿠니미 아키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그거 하나만 줘라. 마지막 하나 남은 캐러멜 포장지가 작은 손 안에서 요령 좋게 펼쳐졌다. 노을빛으로 빨갛게 반짝이는 캐러멜을 하나 삼키면서 히나타는 아키라란 이름만 아는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맛있다. 히나타 쇼요는, 쇼요라는 아이는 웃을 때 보조개가 팬다. 인상이 순하다. 입술이 예쁘다. 그리고 아키라는 이 높고 밝은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그날부터 십 년도 더 넘게 지나 내일은 쇼요의 생일. 손이 간지러워 옆을 보면 늘 캐러멜을 뺏어가던 쇼요가 뺨을 붉히며 아키라를 불렀다.

W.라펠(@the78remin_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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