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W.라펠(@the78remin_pub)​

​오늘은 꼭 늦지 마세요

   축 결혼

 

   미야기의 자랑 - 작은거인 히나타 쇼요와 연하킬러 스가와라 코우시.

 

   쇼요는 단골 정육점에서 크로켓 하나를 문 다음에야 저 현수막을 발견하고는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연하킬러 아니에요! 제 코우시는 연하킬러가 아니라고요! 연하킬러 아닌데! 그래봐야 이미 볼 사람들은 모두 구경한 뒤였고, 당사자의 눈에도 느끼한 얼굴로 정장을 입은 자기 모습이 참 어린애 마음에 불 지르는 제비처럼 보였다. 그럼 뭐 어때? 이미 쇼요는 나랑 결혼했는걸. 그리고 저 현수막을 내걸었을 카라스노 졸업생들 전부 우리 연애를 알고 있을 테니, 노림수는 틀림없이 현수막을 잡고 직접 내리겠다며 끙끙대는 저 귀여운 아이일 것이다. 아이, 어린애, 어리다, 버릇처럼 그렇게 봤지만 이미 어른에 결혼해서 스가와라 쇼요인 예쁜이, 그의 쇼요는 한참을 밑에서 돌아다니다가 지쳐 차에 실려 갔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이틀째, 이제 내일이면 도쿄에 돌아가서 집을 정리해야 한다. 다이치더러 침대 대신 받아달라고 부탁했는데 과연 잘 들어갔을까. 연락이 없으니 다 잘 됐겠지. 그냥 보내기 아쉬운 밤이라 모처럼 추억의 장소를 빙빙 돌아보려 했더니 쇼요의 여동생이 달려들어 자기 오빠를 뺏어갔다. 도쿄 가면! 오빠 다시 못 보잖아. 아냐, 나츠, 오빠 또 올 거야. 오빠는 나보다 저 사람을 더 좋아하잖아! 나츠, 저기, 오빠 결혼했어. 오빠 미워! 오빠 노릇은 힘들어. 인심 좋게 쇼요를 나츠에게 안겨주자 멍청한 오빠와 다르게 반에서 1등을 했다는 여동생님은 쇼요를 태운 차를 황급히 출발시켰다. 그랬더니 달랑 혼자 남았다는 얘기.

 

   아무리 고향이라지만 평일 밤에 남아있는 친구가 없었다. 대부분 다른 도시로 가 버리기도 했고 있다는 애들도 신혼인데 비켜줘야죠, 쓸데없이 배려를 해주는 바람에 단골 술집에 들어가서까지 심심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도 나츠한테 아양을 부려 끼워달라고 할걸. 멍하니 가다랑어 토란조림에 찬술을 곁들이다 전화가 울리면, 설령 그게 누구라도 반가워지는 법이다.

 

   “상쾌군, 심심하다면서?”

   “사 줄게.”

   “새신랑이 바람맞았다며? 불쌍해라.”

   “술 사 줄게, 나와라.”

   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런 의미에서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좋은 상대였다. 어제가 이모님 생신이셔서 돌아왔다는 그는 과거에 미야기 대표 자리를 두고 겨룬 배구부 세터 라이벌이었고 현재의-. 애매하네. 우리가 뭐지, 우리가 무슨 친구였나? 참,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어.

 

   “히나쨩은? 벌써 소박맞았어, 스가와라 씨?”

   “여동생이랑 놀러갔어. 신혼여행 내내 부루퉁했다는데 서비스 해줘야지.”

   “그래서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바로 버림받았다. 하와이는 어땠고?”

   “하와이 좋았지.”

   역시 오이카와 토오루님은 오시자마자 얄미운 소리를 하며 가장 비싼 안주인 모듬회를 주문했다. 스가와라가 여기 올 때마다 한 번 시켜보지 못한……. 참치와 연어와 광어, 도미가 보기 좋게 석 점씩 올라간 모듬회에 곁들이기로는 잔도 아닌 한 동이 찬 술. 이죽이죽 웃는 얼굴로 보아 다음 시킬 메뉴는 두 번째로 비싼 도미조림 같다.

   어쨌든 하와이는 재밌었다. 쇼요는 예전부터 신혼여행으로 하와이를 고집했다. 하와이 여행책자를 들고 집을 뛰어다니면서. 가보고 싶어요! 갈래요! 보내주세요! 같이 가요! 볼을 통통하게 부풀리며 조르는 연인에게 거역할 이유는 없었다. 그럼 하와이에 가자, 그리고 스쿠버다이빙도 하자. 정작 여행책자는 너덜너덜해져서 비행기에 들고 타지도 않았지만. 밝은 주황색 수영복을 입고 깨끗한 백사장을 뛰어다니는 쇼요, 햇살은 환하고 바다는 끝없이 파래서-. 도망치는 쇼요를 잡아서 엎어놓고 선크림을 잔뜩 발라줬다. 햇볕이 이렇게나 쨍쨍한데 맨몸으로 다니다간 화상입기 십상이지. 우리 바보 쇼요. 간지럽다고 버둥거리는 몸은 밤이 돼서야 실컷 혼내줬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의미로, 하와이의 바다가 보이는 리조트에서 미니스커트 웨딩드레스를 입은 쇼요가 어떻게 보였는지는 대충 상상대로, 뭐든 그것보다 열 배는 더 야하게. 다음날 코우시는 해변에서 겉옷을 벗지 못했다.

 

   “쇼요한텐 내 등짝이 사냥감이야?”

   “계속 그러면 코우시의 다른 곳을 노리겠어요.”

   “네, 마음대로 하세요. 살려만 주세요, 쇼요님.”

   손가락이 쪼글쪼글해지도록 헤엄치는 쇼요에게 밥을 먹이는 역할은 선배가 떠맡았다. 물에서 쟤를 꺼내서 먹이고, 또 먹이고, 간간히 선크림을 다시 발라주고. 덕분에 얼마 놀지 못했는데 그만큼 밤에 보상해주니 좋다고 넘어가보자. 코우시는 저한테 고마운 줄 아세요. 제가 나쁜 마음먹었으면 코우시 홀랑 빈털터리로 만들 수 있겠어, 개소리를 하는 쇼요도 예쁘다, 예쁘다만 해주자. 돌아오기 전날 밤, 쇼요는 리조트에서 제공한 바비큐 플랜에서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밤새 끙끙 울었다. 제가 그러면 좀 말려주셨어야죠. 괜한 트집을 잡으면서 엉엉 우는 쇼요의 손을 또 내내 잡아주었다. 부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여야 합니다. 쇼요는 웃으나 우나 언제나 예쁩니다.

   “그래도 참 용해. 결혼식 끝나자마자 갔는데 그럴 힘이 있었어?”

   “표를 좀 싸게 하려고 식 끝난 다음날에 갔어. 반나절 쉰 셈이지.”

   “아직 현역이시네요.”

   “현역은 우리 쇼요, 난 그냥 맞춰서 따라간 셈이야.”

   오이카와는 재미삼아서라도 더 자세히 신혼부부의 첫날을 캐고 싶단 뜻을 내비쳤지만 그가 바라는 대로 온건히 거절하며 무시했다. 까만 간장종지에 와사비를 넣고 흔들었다. 이번 주문은 예상대로 도미조림이었다. 축의금 낸 만큼 다 먹어라, 그래. 그래도 있는 힘껏 서비스한 보람 있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쇼요는 인심 좋은 얼굴로 창가 리를 양보해줬다.

 

   사랑이란 뭘까. 진지하게 결혼을 고민하기 시작하기로는 몇 년, 그보다 앞서 막연히 평생 쇼요 곁에 있고 싶다고 바라기로는 꽤 길게 이어졌다. 당장은 무리라도 나중엔 마당이 딸린 집에서 예쁜 내 쇼요와 귀여운 아이 둘, 그리고 개를 한 마리……. 한 손에는 아이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개 목줄을 쥐고서. 쇼요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코우시, 전 아직 거기까진 잘 모르겠어요. 고등학생 둘이서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자주 그렇게 끝이 났다.

 

   “이사는 안했어?”

   “동거하던 집 그대로 신혼집 차리기로 했어. 이사는 아이 생기면 하려고.”

   “아이고, 알뜰하십니다.”

   비아냥거림이 그리 싫진 않았다. 부러우면 너도 결혼해. 당당히 콧대를 세우며 도미의 큰 살점을 발라냈다. 코우시는 먼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쿄로 갔고, 그 다음 쇼요가 졸업하면서 둘은 자연스레 함께 살기로 했다. 처음엔 쇼요의 잠버릇에 코우시가 걷어차였고, 코우시의 입맛에 쇼요가 배를 부여잡았지만 점차 서로 맞춰가면서 사랑이 깊어진 둘은 밤낮으로, 뭐, 그런 거. 지금 사는 곳은 역과 가까우면서도 값이 괜찮아서 이사하기 아쉬웠다. 그리고 가격에 비해 방음이 좋아서, 이것도 생략합시다. 현관부터 베란다까지-.

 

   “그래도 너희가 정말 결혼할 줄은 몰랐는데.”

   “왜.”

   “보통 그러잖아? 첫사랑에서 결혼까지 간다니.”

   “왜 첫사랑이라 생각해?”

   “보면 알아.”

   연애 경력으로 따지자면 미야기에서 오이카와 토오루님을 따를 자가 없지. 나쁜 말을 하자 도미 살점이 뭉텅이로 사라졌다. 하나 남은 곤약도 같이. 야. 왜, 바람둥이 오이카와 씨는 원래 악랄하십니다. 헛소리해서 미안하다. 알아도 이미 도미는 없습니다. 쇼요를 벌벌 떨게 했던 눈이 침착하게 메뉴판을 훑었다. 다음 타자는 가리비 튀김이라는 입 모양이 얄밉다.

 

   쇼요는 겁이 많았다. 근처에서 큰 소리가 들리면 펄쩍 뛰어올랐고 주로 우시지마나 오이카와, 또는 마츠카와, 가끔은 도쿄의 누구누구처럼 낯설고, 크고, 뻣뻣한 상대를 배구와 다른 곳에서 마주칠 때면 덜덜 떨면서 친근한 상대의 뒤로 숨어버렸다. 스, 스가와, 스가와라 서, 선배, 갔어요? 네? 갔어요? 누굴 말하는 걸까. 오이카와 씨요! 오이카와 토오루가, 왜? 왜, 왜 스가와라 선배도 무섭게 말씀하세요! 그때는 쇼요 입에서 나오는 다른 모든 사람 이름을 죄다 질투했다. 무섭다는 것도, 잘생겼다는 것도, 특히나 배구 잘한다는 말에는 더. 쇼요는 배구를 좋아하고 배구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네가 카게야마한테 멋있다고 할 때마다 이쪽은 억장이 무너졌다. 저도 만만치 않았어요, 코우시. 술 취한 고백에 귀여운 후배는 순한 눈을 부릅뜨며 주정을 부렸다. 코우시는 저한테 자긴 매운 음식 잘 먹는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했잖아요. 저 그때 마파두부 먹는 연습 하느라 탈나서 병원 자주 다녔어요. 고등학생 시절은 자주 부끄러웠다. 그래도 쇼요와 만나서 굴러다닌 3학년 반 정도만 가장 창피해서 버티고 살았다.

 

   밤이 무서우면 같이 가자. 쇼요도 나랑 가는 게 좋지? 어둔 길을 걸으며 쇼요의 자전거를 대신 끌어주었다. 자전거의 작은 바구니엔 자주 초콜릿이나 에너지 바 같은 간식거리를 넣어두었다. 가는 길에 먹어, 코우시는요? 난 괜찮아, 집이 가깝잖아.

 

   에너지 바, 초콜릿, 날이 좀 따뜻하면 만두, 너무 추울 때는 손난로. 그리고 초콜릿. 사귀기 시작해서 처음 맞은 밸런타인데이.

 

   “너희 밸런타인데이에 한 짓거리 보면 다 알아.”

   “어-.”

   “그때 내가 소문도 냈는데. 상쾌군이랑 카라스노의 조그마한 꼬마랑 사귀어서 사랑놀이 진하게 한다고.”

   “표현이 좀 낡았네.”

   그 정도로 반박하기가 한계였다. 그래, 남들도 다 알아보는 연애질, 불장난, 쇼요와 나의 알콩달콩하던 첫 연애.

   밸런타인데이. 쇼요는 직접 만든 초콜릿을 선물하고 싶어 했고, 난 쿠키를 만들려고 안절부절못하면서 지냈다. 둘 다 자기 손으로 뭔가 만들어본 적 없는 아이들이었다. 가정 실습시간이야 해봤지만 그때도 재료를 대강 손질해서 끓인 고기감자조림이나 재료배합이 끝난 가루에 물을 넣어 뭉치기만 하는 찹쌀떡을 만들었지 본격적인 쿠키나 초콜릿과는 별로 연이 없었다. 반짝반짝하게 모양 예쁘고 맛있는 디저트도 거의 먹어보지 못했지. 그나마 그런 쪽에 일가견이 있는 츠키시마를 닦달해서 정보를 얻었지만 마들렌, 피낭시에 등 이름부터 생소한 과자를 훑어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쇼요. 나 이런 건 못하겠어. 그리고 쇼요도 마찬가지로……. 츠키시마가 사이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절대 쇼요한테 말하지 마, 알겠지? 째째시마, 코우시한테 이르면 가만 안 둘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참 많이 짜증났겠어. 어쨌든 우리는 뭔가를 만들긴 했다. 아주 많이.

   자신이 없으니 분량이 늘어났다. 다섯 번에서 하나 건지긴 어려워도 백 개 중에서 둘 정도는 살아남을 거라는 우스운 계산 탓이었다. 설날 용돈을 탈탈 털어서 재료를 사왔고, 바쁜 학교생활과 배구연습, 수험 중에도 틈틈이 짬을 내서 부엌에 틀어박혔다. 난 그래서 네가 수험 일 년 더 하려는 줄 알았어. 다이치가 너무한 소리를 했다. 참고서에 밀가루 반죽이 묻어서 기가 차긴 했어도 그렇지.

 

   “하여튼 웃겼어. 꼬마가 의리 초콜릿이라면서 초콜릿을 내미는데-.”

   “안에 술이 들어있대서 기대했더니,”

   “츄하이가 들어있었잖아.”

   보통 초콜릿에 술이 들어있다 하면 츄하이는 아니야, 쇼요. 부모님이 사놓은 츄하이를 두 캔 훔치면서 예쁜이 쇼요가 얼마나 설렜을까. 이거 들켰다간 엄마한테 혼날 거야! 엄마한테 혼나면 내일 도시락에 들어갈 돈가스가 날아가! 레시피 책에는 삼 일간 보관이 가능하다 해서 우린 삼 일 전부터 가족의 눈총을 받아가며 부엌 한구석을 점령했다. 설탕이 흘러내려 잘못 쏟아진 바닥이 끈적끈적해져서 발바닥에 달라붙었고 억지로 시식한 아사히가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지만 적어도 나는 만들 과자에 주스를 붓진 않았다. 쇼요의 여동생은 쇼요에게 용돈을 주면서 그냥 초콜릿을 하나 사가라고 했다. 끝내 먹을 만한 것을 만들기는 했다. 오이카와가 짚어준 대로, 아주 많이.

 

   소중한 첫 밸런타인데이 초콜릿과 쿠키라도, 며칠 내내 단 냄새만 맡으면서 손목이 아플 정도로 휘젓다보면 연인 얼굴을 반찬삼지 않고서야 도저히 씹어 삼킬 수도 없었다. 우린 서로의 성의를 생각해서 웃는 얼굴로 하나씩 먹은 다음 제각기 만든 물건들을 근처에 뿌리러 다녔다. 본교에서 아는 사람들은 죄다 질린 표정으로 꺼지라고 하는 바람에 타교까지 넘어갔고, 쇼요는 나보다 발이 넓어 시라토리자와 학원에 가서 성격 더러운 텐도에게 오해를 살 뻔했다. 당연하지, 하트모양 틀에 찍어서 LOVE라고 정성스레 박힌 초콜릿이 밸런타인데이 고백용 초콜릿 아니면 뭐겠어. 느닷없이 카라스노 1학년에게 고백 받은 텐도가 상대를 상처주지 않을 거절의 말을 떠올리는 동안 쇼요는 고시키와 세미, 우시지마들한테도 초콜릿을 건넸고……. 감히 네가 날 농락해?! 하고 발을 구르는 텐도를 버려둔 채로 카쿠가와 고교로 향했다. 남은 초콜릿과 쿠키는 잘 모아, 김 포장에 들어있던 실리카겔을 동봉해서 도쿄로 보냈다. 쿠로오한테 보내면 마음 착한 네코마 주장님이 자기애들이랑 부엉이 친구들에게 잘 나눠주겠지.

 

   “그날 꼬마가 참 여럿 놀렸어.”

   “본인은 고의가 아니었을 거야.”

   “그래도 유죄야.”

   “그건 인정한다.”

   귀여운 쇼요가 건네기 부끄러워하면서 수줍게 건넸던 하트 모양 초콜릿. 그 오해덩어리를 위해서 자기 애인한테-, 선물하다가-, 너무 많이 만들어서-, 웃기지? 말하고 다녀준 오이카와한테 고맙다고 인사해야 했다. 그런데 인사하기 싫다. 상쾌군 쿠키 너무 맛없어서 이와쨩이 먹다가 변기에 버렸어. 그래, 절대 안 해. 치사한 자식아.

   “그것뿐만이 아니지. 그러고 보니 참 징글징글하게…….”

   “징그럽지 않았거든!”

   쇼요는 코우시가 좋아서, 코우시는 쇼요가 너무 좋아서 등굣길에서 하굣길까지 함께 있었고, 학교에선 쉬는 시간마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으면 못 견뎌했다. 쇼요는 집이 멀어 아침에 코우시 집까지 데리러 와서, 저녁엔 선배를 집에 밀어 넣고 돌아가길 매일 반복했다. 너무 힘들지 않아? 저야 어차피 다니는 길이잖아요. 그리고 나중에 코우시 이만큼 고생시킬 거예요. 딴에는 수험공부로 지친 선배를 위한 배려였겠지. 도시락에서 자기가 싫어하는 파드득 나물을 내 밥 위에 부어버린 이유도 나물이 수험생 몸에 좋기 때문이다.

 

   코우시, 채소 많이 먹어요. 채소가 몸에 좋대요. 쇼요는? 쇼요는 고기를 먹어야 해요. 쇼요 몸에 고기가 좋대요.

 

   “너희 주장이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키스 그만했으면 좋겠다.”

   “응, 너랑 꼬마는 참 대단했어.”

   같이 있으면 손을 잡고 싶고, 손을 잡으면 눈이 마주쳐서 마지막으론 서로 입술을 비비지 않고선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 둘이서 체육관 비품보관실에 들어가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꼭 저 꼴을 봐야겠냐? 코치님은 순수한 두 아이들의 사랑을 심하게 꾸짖지는 못하셨다. 다만 너희 둘이 알아서 뒷정리를 하라고 맡기셨는데-, 도와주러온 아사히와 다이치가 못 볼 꼴을 봤지. 우리 명예를 위하자면 단언컨대 공공장소에서 했을 때 심히 부도덕한 행위는 아니었다.

 

   “너 졸업할 땐 꼬마가 죽어버렸잖아. 그땐 어떻게 했어?”

   “나도 같이 울었지.”

   “그때 헤어졌어야 했는데.”

   “남의 행복을 질투하는 거야?”

   “너희가 싫은 거야.”

   내 가슴에 머리를 파묻은 채 펑펑 울던 쇼요를 생각했다. 쇼요는 세상 이목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일 년 늦게 가라, 반 년만 늦게 가라, 날 데려가라, 숨을 참아가면서 매달렸다. 그러지 마, 쇼요. 난 졸업해도 쇼요 거야. 그럼 나랑 있어요! 그게……. 내 거라면서! 거짓말쟁이! 그게, 미안. 그래도 용돈을 모아 꽃다발을 사온 점은 또 상냥하고 귀여운 평소의 쇼요였다. 코우시가 쇼요를 버리고 멀리 가버려. 눈물이 가득한 얼굴은 엉망진창에 눈이 빨갛게 부어버렸다. 코우시가 많이 미안해요. 까만 가쿠란의 두 번째 단추를 떼어내서 손에 쥐어주자 쇼요는 앙증맞은 주먹으로 자기 높이에 잘 닿는 복부를 후려쳤다. 아무리 귀엽고 깜찍하고 사랑스럽고 달콤하고 주머니에 들어갈 것 같고 품에 안기면 요만하고 불면 날아갈 쇼요지만 나름 고등학생, 그것도 운동부 남학생이 있는 힘껏 친 주먹이다. 아직 벚꽃이 피지 않아 나뭇가지에 파릇파릇함만 싹틀 계절에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다시는 쇼요를 기만하지 않겠습니다. 앞으로 절대 쇼요만 버려놓고 홀랑 가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쇼요도 함부로 코우시 때리기 금지에요. 손찌검은 하면 못 써. 미안해요, 코우시. 집을 떠날 기차에 탔을 때 비슷한 광경을 한 번 더 연출했다. 이땐 쇼요에게 전날 몰래 맞춘 커플링을 쥐어줬다. 사랑의 보석이자 쇼요의 탄생석이고, 인조로 만들어서 값이 고등학생 하나가 한 주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면 살 수 있는 금액인 진주반지를 하나. 쇼요는 반지를 낀 손으로 펑펑 울면서 내 가슴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쁜 놈, 이러고 떠나면 난 어떻게 살라고. 쇼요는 잘 살아서 매 끼니마다 밥을 세 그릇씩 먹었지만 밤중에 내 전화를 친구가 받은 날, 날 보러 우리 학교까지 찾아와서 또 목을 놓고 울었다. 나쁜 놈, 내가 고등학생이라 싫어요?! 쇼요야, 쇼요야. 내 예쁜 쇼요야.

 

   “확실히 원거리 연애는 힘들었어.”

   “용케도 헤어지지 않았구나, 했다니까. 너희 그때까지만 해도 같이 있는 날보다 떨어져있던 날이 더 길었잖아.”

   아무리 방학 때마다 돌아온다 해도 학기 중엔 쉽게 올 수 없고, 고등학생이자 배구부 차기 에이스에서 에이스까지 된 쇼요가 용돈을 모아 찾아오기도 어려웠다. 그러니까 네가 힘들다면, 네가 바란다면……. 나 때문에 헤어진다, 한 번만 더 그딴 소리 했다간 코우시의 더듬이를 뽑아서! 그 다음 말은 듣지 못했다. 얌전히 고개를 숙여 쇼요의 입에 입술을 포개고, 꾹 눌러서 호흡도 한데 겹쳤다. 우리의 첫 키스는 체육관 뒤편에서 했다. 그때도 쇼요가 먼저 눈을 감고 자기 입술을 비죽이 내밀었다.

 

   “그래서 결심했지. 될 수 있는 한 빨리 결혼하자고.”

   “그래서 청혼하고?”

   “응, 솔직히는-. 내가 당했어.”

 

   어른이 된 쇼요는 가끔 취해서 코우시의 전화벨을 시끄럽게 울렸다. 코우시, 저에요, 전데요, 코우시가 너무 보고 싶은데 어떡하죠? 코우시 사랑해요!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우린 평생 같이 살아야 해. 그리고 쇼요가 그러자고 했으니까 결혼도 하자.

 

   오이카와는 도미조림은 벌써 다 먹어버렸는데 술이 남아서 닭껍질 폰즈를 주문했다. 그러면서 술도 더 시킨다. 좋다, 안주가 저렴하니 그나마 감사드립니다. 닭껍질 폰즈는 바닥에 흥건한 폰즈 위에 노릇노릇한 닭껍질이 잔뜩, 그리고 위엔 하얗게 갈은 무와 파란 파가 올라가서 보기 좋았다. 곁들이로 나온 갓 절임도 짭조름하면서 깊은 맛이 괜찮다. 좀 느끼해진 입에 알맞은 안주라 스가와라도 젓가락을 움직였다. 갓을 이렇게 절이니 또 괜찮네. 다음에 만들어보면 쇼요가 좋아해주려나. 아직도 자주 나물이나 채소류는 편식하는 쇼요 씨, 나중에 애한테 뭐라고 하려고? 너 편식하면 엄마처럼 키 안 큰다! 응, 맞는 말이네. 쇼요는 너무 똑똑해서 차마 내가 반박할 수 없었다.

 

   저는 코우시가 갖고 싶고, 코우시 애도 갖고 싶고, 아이는 우리 둘이 같이 키웠으면 좋겠고 함께 살면서 코우시 애교를 받아주고 싶어요. 선배도 좋죠?

 

   “난 쇼요의 포로거든.”

   “네?”

   “적당히 알아들어줘.”

   “아, 네, 그러시군요. 아이고, 제가 실례했습니다. 댁이 남의 남자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찾아와서-. 그래서 연하킬러님의 존함이?”

 

   비아냥거림을 대충 무시하고 술로 입을 씻어냈다. 부러우면 너도 결혼해라. 그럼 난 네 앞에서 네 돈으로 장어구이를 씹어주겠어.

 

   쇼요는 정장에 빨간 나비넥타이를 묶으려 했다. 그게 멋있다는 앳된 후배한테 네가 그랬다간 내 꼴이 연하 잡아먹는 나쁜 놈이 된다는 해명을 하고 까만 타이를 골라주었다. 대신 부케와 식장 장식은 쇼요가 원하는 대로 고르게 해주었다. 전 예전부터 식장에 하얀 장미가 좋았어요! 쇼요의 꿈은 소박하고 값비쌌다. 그나마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는 야치가 많이 도와줘서 적은 돈으로도 식장을 화사하게 꾸며냈다. 부케는 붉은 장미에 연보랏빛 달리아와 이베리스를 섞어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꽃다발을 주문했다. 식을 위해서 바삐 뛰어다닌 매일매일은 밤마다 쇼요와 머리를 맞대고서 곯아 떨어졌다. 우리 결혼식 사진 많이 찍어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두고두고 사진 보면서 얘기해야죠. 동영상도 찍자. 아예 그날 쓸 장식을 나중에 좀 집에다가 붙여둘까요? 이런 말들로 투덜거렸던 보람이 있게, 우리 결혼식은 정말 최고였다. 코우시는 쇼요가 너무 예뻐서 눈이 멀어버리는 바람에 실수로 부케를 잡아버려 키요코한테 등짝을 얻어맞았다.

 

   하얀 길을 걸어오던 쇼요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 손을 잡는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축복해주는 앞에서 너무나도 사랑하는 연인과 반지를 끼우고 키스를 했다. 네, 전 히나타 쇼요를 사랑합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데 지금, 네가 없네. 이상한 기분이다. 분명 쇼요는 여동생이랑 함께 재밌게 있을 텐데. 그래도 쇼요가 없었다. 하는 수 없지, 먼저 인심 좋게 나츠한테 양보했으니 오늘은 기껏해야 전화 한 통으로 참아야한다. 어차피 내일부턴 다시 하루 종일 붙어있을 텐데, 뭘.

 

   “아직 영업하죠?”

 

   문이 열린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일까 싶어 고개를 돌리면 정말로 아는 사람이 목도리를 풀며 가게에 발을 들였다. 발치에 하얀 카펫은 없지만 아는, 잘 아는, 잘 알고 좋아하며 사랑하는 사람. 그의 쇼요. 쇼요는 발을 몇 번 굴러 눈을 털어낸 다음 좁은 가게를 빙 둘러보다 자신의 반려를 발견하고 입 꼬리를 올렸다. 목도리는 여럿 중에 코우시의 자신작, 짙은 파란색 털실 사이사이에 가는 하얀 실로 무늬를 새긴 것을 팔에 걸쳤다. 웃음, 쇼요, 코우시의 잘 웃는 쇼요. 머리가 복슬복슬해서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뽀얀 쇼요.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어, 밖이 추웠지, 어떻게 온 거야, 나츠는? 그리고 배고프겠다, 등 여러 말이 맴돌아 입을 열지 못한 스가와라에 앞서 오이카와가 먼저 손을 들었다. 어서 와, 히나쨩! 얄미운 자식.

 

   부케를 휘두르면서 뚜벅뚜벅 걸어오던, 전 오늘 결혼해요, 속삭이던 쇼요가.

 

   “안녕하세요, 오이카와 씨.”

   “응, 새 스가와라 씨. 결혼 축하해.”

   “쇼, 쇼요, 어떻게 알고 왔어?”

   “오이카와 씨가 메일 주셨거든요. 상쾌군 울 거 같으니까 빨리 와. 그래서 왔어요.”

   뒤늦게나마 서둘러 의자를 빼서 쇼요를 앉혔다. 그리고 다시 일으켜 세워 코트를 받고, 또 앉힌 다음에 목도리를 뺏고……. 취기가 오른 탓에 얼굴이 화끈거려 손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런 동안 오이카와는 탁자를 두드리며 웃었고 쇼요는 맥주를 한잔 주문했다. 남은 닭껍질은 고스란히 쇼요 차지. 이것만으로는 부족할까 싶어서 메뉴판을 가져오자 쇼요는 얌전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봐도 오이카와 앞에서 폼 잡는 모습이지. 저는 이제 다 커서 오자마자 닭튀김 시켜요, 배고파요, 칭얼거리지 않습니다!

 

   그 증거로 전 세이죠 주장님이 나가버리자마자 쇼요는 큰 소리로 곱창조림과 밥과 맛 달걀을 두 개 주문했다. 맥주는 물마시듯이 삼켜버리고 새로 홉피를 시켜서 유리잔에 이름 없는 소주를 콸콸 섞어놓았다. 곱창조림의 두부엔 밥이랑 달걀노른자가 잘 어울려요! 코우시도 알죠? 입은 끊임없이 밥을 우물거렸고 눈은 메뉴판을 샅샅이 훑으며 다음 메뉴를 노려보았다. 회? 아냐. 구이? 아냐. 튀김? 좋다, 닭튀김. 아니다, 닭껍질을 먹었다. 아니다, 닭껍질과 염통, 살코기는 다르다. 닭껍질 꼬치구이도 먹고 싶다. 코우시는 쇼요의 혼잣말을 눈빛만 봐도 전부 읽어냈다. 그에 비해서 쇼요는……. 쇼요는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은 듯이 웃으면서 시치미를 뿌린 곱창 한 조각을 들이밀었다. 먹고 싶었어요? 진작 말하지. 응, 응, 응…….

 

   쇼요 한 입, 나 한 입. 서로 번갈아가며 향하던 수저는 주인아주머니의 준엄한 일갈로 조용해졌다. 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러더니 결혼하고 나선 아주 못 볼 꼴이라는 말에 다소곳이 손을 내린 쇼요가 발목을 살랑살랑 코우시를 두드렸다. 저기요, 저기요, 이쪽 좀 봐주세요. 예전부터 살짝 당기거나 건드려서 주의를 끌던 쇼요는 낯빛도 귀엽게 발그스름한 색이었다.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귀를 기울이면,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목소리가 친근하다.

 

   “저, 코우시? 있잖아요.”

   “응?”

   “저랑 결혼해줘서 고마워요.”

   나중이, 그 나중이란 말이나 어차피 세상은 바뀐다거나, 사람의 감정이란 일시적인 것, 마음을 어떻게 믿나요, 석양도 질 때가 있다 네가 한번 두고 봐라, 적당히 그런 것들 앞에서 어떤 시간이 되어서도 스가와라 코우시는 내 쇼요 앞에서 갖은 아양과 앙탈을 떨며 함께할 것임을 서약과 함께 맹세했다. 히나타 쇼요 씨, 수고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많이 애써왔으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제부턴 저도 떳떳하게 물심양면으로 당신 곁에서 노력하겠습니다. 신고서를 작성하면서 인주를 들고 빨강을 여러 번 고민했다. 지금까지 행복하던 우리 관계를 내가 멋대로 수렁으로 떨어뜨리지 않을까. 쇼요가 실수해서 나한테 청혼했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그렇게, 꽤나 심도 있게. 더는 생각하기도 괜찮다. 앞으로도 많이 힘들 일이야 있겠지. 그래도 내가 언제부터 일 저지르고 돌아와서 당당하지 못한 사람이었던 것처럼.

 

   쇼요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서 1학년 때는 학기 중에도, 그리고 2학년부터는 내가 방학일 때마다 나란히 앉아 내게 과외교습을 받았다. 부모님의 신뢰 때문인지, 우리는 그땐 둘만 있어도 어쩐지 수줍고 나쁜 짓을 저지르는 기분이라 쉽게 끌어안고 애정표현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헛도는 자전거 체인, 소란은 잠시 끊긴 뒤에 도로 이어졌고 후배는 연필을 쥐고서 고개를 숙인 채 꾸벅꾸벅 졸음을 견뎠다. 지금 자면 안 돼. 잠자는 공주님은 키스로 깨워줄까? 분홍빛 입술이 괜히 부끄러워 대신 손을 잡았다. 책상 밑으로 몰래 손가락을 꼬물거리면, 쇼요의 손이 잡혀 꼭 쥐고서……. 작은 손바닥을 펼쳐 검지로 한 자 한 자를 정성스레 적었다. 좋, 아, 해. 저, 도, 요. 공부하다 잠깐 뽀뽀한다고 해서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았을 텐데, 우린 정말 똑같이 어수룩했다. 지금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변하지 않았을 테니. 네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던, 내가 좋다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던.

 

   “사랑합니다.”

   “네, 저도요.”

   “사랑해요?”

   “사랑하고 말고요. 쇼요 씨.”

   따끈한 곱창조림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고소한 냄새와 함께 서로 닮았다는 말에는 잠자코 고개를 숙인 채 키득거리는 코우시와 쇼요.

스가와라 코우시 X 히나타 쇼요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