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함께 걸어가다

W.말랑말랑(@sct000000)​

카게야마 토비오 X 히나타 쇼요

※개인설정이 많습니다

※자가설정의 오메가버스AU포함

 

1.

   "그런데 카게야마 너는 방학숙제 다 했어?"

 

   카게야마와 히나타 사이에 배구공이 통통 교차한다. 문득 던져진 히나타의 물음에 카게야마는 배구공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조금 움직였다.

 

   "숙제? 그걸 내가 왜?"

   "…과연, 카게야마 군은 그쪽인가요. 애초에 할까 말까 고민하는 선택지조차 없는 쪽인가요."

   "뭐야, 문제 있냐."

   문제는 없다. 오히려 너무 통상의 카게야마 토비오라서 감탄했다. 정말이지 이 녀석 배구 없으면 뭐하고 지냈을까? 히나타는 속으로 웃어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서 다시 말없이 몇 번 배구공이 오고간다. 해가 중천이다. 히나타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날아오는 배구공을 리시브해서 높이 띄우고는 품안에 가볍게 안아든다. 갑자기 끊어진 흐름에 카게야마도 멈춰 섰다.

 

   "ㅡ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먼저 갈게."

   "뭐? 왜!"

   "엑. 왜 화내는 거야? 어제 말했잖아! 숙제하러 갈 거라서 오늘은 조금밖에 연습 못한다고. 오늘 미술관에서 하는 특별전 마지막 날이라서 더 미루지도 못해."

   히나타의 말에 카게야마는 어제의 기억이 수면위로 올라 오는 것을 느꼈다. 짧게 교환하는 메시지 속에서 히나타가 그렇게 말했었지. 그러고 보니 확실히 듣긴 들었다. …듣기만하고 그대로 까먹어 버렸지만.

 

   "…그거 그냥 안 내면 안 되냐?"

   "싫어, 새 학기부터 선생님한테 혼나기 싫단 말이야."

   혼난다고 해봤자 약간의 잔소리와 수행평가점수가 깎이는 정도지만 이제 곧 2학년이 되는데 담임선생님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미운털이 박히는 건 싫다. 게다가 히나타는 숙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정면에서 무시할 성격이 아니었다. 실수로 까먹을 수는 있어도 고의로 빼먹지는 못하는 것이다.

   봄고도 끝났고, 3학년 선배들은 졸업했다. 어영부영 여기까지 미뤄왔지만 이제 정말 개학이 코앞이다. 좀 더 배구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배구공을 던져주었다. 카게야마는 눈썹을 찡그리면서 그것을 받아들인다.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키도 말쑥하니 큰 녀석이 뾰로통한 얼굴을 한다. 저럴 때 보면 참 어린 애 같다. 히나타는 쓴웃음 짓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미안, 카게야마. 가방에서 목도리를 꺼내 목에 두르고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기위해 돌아섰던 히나타는 큼직한 스포츠 백을 어깨에 걸치는 카게야마를 볼 수 있었다.

   "카게야마?"

   "나도 간다."

   "어?"

   "빨리 미술관 다녀와서 시간 남으면 조금 더 연습할 수 있잖아. 그거라면 문제없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미술관에서 얼마나 시간을 보낼지 몰라서 일부러 좀 이른 시간부터 넉넉하게 출발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빨리 둘러보고 오면 한 시간 남짓 걸릴까? 그렇지만 히나타는 놀랐다.

   카게야마랑 미술관…

 

   '놀라울 정도로 엄청 안 어울린다.'

   카게야마와 미술관. 심지어 자기가 먼저 같이 가자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아닐까. 저도 모르게 하늘을 바라보고 만다.

   "뭐해. 빨리 안 출발 하냐? 시간 없어."

   "가. 갈 거야. 간다고."

   히나타는 정신을 차리고 카게야마의 뒤를 급하게 따라갔다. 좀 놀랐지만 싫진 않았다. 히나타는 역시 혼자보다는 누군가랑 같이 가는 게 훨씬 더 즐겁다.

2.

   별 것 아니었다. 그다지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다. 그날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함께 그림 속을 거닐었다. 같이 미술관에 왔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 찍은 둘의 사진. 밥은 근처의 라멘 가게에서, 남은 시간에는 미술관 주변의 넓은 잔디밭에서 짧은 배구 연습을 했다. 그러고는 버스를 타고 함께 돌아왔을 뿐이다.

 

   그래도 뭔가 평소와 다른 일상을 함께했다는 점에서, 히나타에게 상당히 인상 깊은 일로 남았다. 학교에서 보고, 주말에도 종종 보고, 일주일의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사람이지만 그 사이에 이런 얌전한 문화생활 같은 일이 있는 건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배구 관련된 일 말고는 명절에 참배조차 안 간단 녀석인데.

 

   "왜?"

   "응, 아니."

   히나타는 입에 물고 있던 젓가락을 도시락으로 옮기며 고개를 저었다. 2학년에 같은 반이 될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이미 충분히 붙어 사는 두 사람은 이제 그냥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사는 사이로 진화했다. 원래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던 히나타였지만 친구들에 카게야마까지 데려와서 자연스럽게 점심식사도 같이하게 됐다.

 

   학기 초답게 저마다 친구를 만들어 복작복작한 점심식사 시간인데 오늘은 웬일로 친구들이 학생식당에서 사 먹기로 해서 히나타와 카게야마만 함께였다. 엄마가 싸준 도시락에는 문어모양의 소시지볶음과 푹신한 계란말이, 캔 옥수수를 듬뿍 넣은 마카로니샐러드, 야채절임이 들어있다. 문어모양 소시지를 입에 밀어 넣는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앞을 보았다.

 

   같은 반 되면서 안 건데, 카게야마는 운동하는 애치고는 도시락이 간단했다. 비닐봉투 안에는 빵 두세 개와 드링크 요구르트, 우유 정도가 들어있었다. 기억으로는 저기에서 가끔 바나나라던가 사과 같은 과일이 추가되는 정도.

 

  먹는 걸 보면 히나타보다 소식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합숙하면서 본 것으로는 히나타보다 더 먹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빵 두세 개정도에 우유가 고작이라니. 덥석덥석 크게 빵을 베어 먹는 카게야마에게 히나타가 물었다.

 

   "그런데 카게야마, 너는 도시락 안 싸와?"

   "이게 점심이잖아."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잘 크려면 잘 먹어야 하잖아? 그런데 좀 부실해 보이고."

   작년에 우카이 코치로부터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듣고 스스로 깨달은 것도 있다 보니까 신경 쓰인다.

   카게야마는 크게 베어문 팥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한다.

   "도시락같은건 부피가 커서 들고 다니기 귀찮아. 그리고 직접 싸 가지고 다닐 시간 없으니까."

   "에, 카게야마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거야?"

   "어."

   부모님이 바쁘신 건가. 깨끗한 집도 뽀송뽀송한 옷도 맛있는 식사를 누리는 것도 부모님의 울타리 아래 자연스러운 일인 히나타에게는 낯선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까 카게야마랑 이야기할 때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극히 드물다. 같이 지낸지가 벌써 1년인데.

   좀 무신경했던 거 같다.

   히나타는 왠지 미안해져서 젓가락으로 계란말이를 집어 올려 카게야마에게 내밀었다.

 

   "먹어, 카게야마."

   "? 뭐야, 갑자기."

   "그냥."

   그러고는 한 번 더 젓가락을 내미는 것이다. 카게야마는 당황해서 히나타를 바라보고는, 어색한 얼굴을 했다.

   "…먹으라고?"

   "뭐야, 우리 집 계란말이 독 안탔거든? 왜 그렇게 경계해?"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한 모습을 보이더니 카게야마는 대신 손바닥을 내밀었다.

   "…여기 줘."

   아니 그냥 입으로 먹지 무슨 손. 히나타는 그냥 입 앞까지 계란말이를 직접 배달해주기로한다. 코앞까지 들이밀어진 것을 카게야마는 얼떨결에 덥석 받아먹고 말았다.

   "맛있지? 더 먹어. 많이 먹어!"

   히나타의 얼굴에 꽃봉오리가 터지듯 미소가 번져나간다. 카게야마는 그 얼굴을 뭔가 눈부신 것을 본 것처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간을 찡그리며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됐으니까, 너나 많이 먹어라. 넌 최소 10센티는 더 커야해."

   "…."

   대판 싸웠다.

 

 

3.

   올해도 여름축제가 열렸다. 이렇게 매해 열리는 축제는 그 무더위마저도 여름의 정취로 만드는 특별함이 있다.

 

   카라스노 배구부도 하루 정도는 연습을 쉬고 짧은 시간이나마 축제를 즐기러 나가기로 했다. 모처럼의 휴식으로 재충전하자는 엔노시타 선배의 제안이었다.

 

   카라스노는 아사히 선배나 스가 선배, 다이치 선배가 졸업한 이후로 수비나 안정성이 다소 부족해졌다. 사람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선배들의 빈 공간에 대한 허전함은 모두에게 있다. 그 부족함을 서둘러 채우고 싶다는 욕심으로 훈련이 엄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중에서 특히 카게야마는 2학년이 된 이후로 새로 들어온 후배들을 무섭게 쪼고 있으니… 이번 제안은 그 딱딱해진 분위기를 풀어주려는 의미도 있지 않을까 히나타는 생각한다. 축제 같은 건 관심 없음을 드러내며 분위기를 깨버리려는 카게야마를 히나타가 필사적으로 말리고 자신이 챙기고 다니기로 결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카게야마는 선배에게 깍듯하고 후배에겐 엄한 운동부 타입이었다. 히나타는 전통이나 군기랄 게 없는 유키가오카 배구부 1대 부장이고, 카게야마는 키타이치라는 이미 미야기 내에서 이름 있는 운동부에 3년을 지냈으니까 경험이나 후배나 선배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최근 히나타는 카게야마보다 어리게 안 태어났음을 요즘 굉장히 감사하고 있었다.

 

   '그 녀석보다 후배였으면 분명 아주 탈탈 털렸을 거야, 무섭다.'

 

   그런 녀석이 선배로 떡 버티고 팝콘 튀기듯 사람을 달달 볶고 있는데 어떻게 한명도 포기하지 않고 힘내주는 후배들이 너무도 기특했다. …라고 비공식 카라스노의 당근 히나타 쇼요는 생각한다.

 

   카게야마가 키타이치 때 버릇을 가지고 있듯이, 히나타는 유키가오카 때 후배들을 꼼꼼하게 챙기던 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둘은 자각 못하고 있지만, 카라스노의 괴짜콤비에 이어 채찍 카게야마와 당근 히나타로 한 세트 취급받고 있었다.

 

   침대 위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이 지잉 울린다. 화면을 확인했다.

 

   [집 앞. 준비되면 나와]

 

   히나타가 후다닥 창으로 달려갔다. 창밖으로 카게야마의 모습이 보인다. 180이 넘는 키의 등이 구부정하게 서 있다. 휴대폰을 보고 있는 거겠지. 히나타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너무 빠르다구, 카게야마!! 금방 나갈게!!"

 

   돌아서 있던 등이 히나타 쪽으로 향하더니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다. 응답해주는 카게야마가 좋아서 히나타는 크게 마주 손을 흔들었다.

4.

   겨울방학에는 겨울방학 숙제가 있듯, 여름에는 여름방학 숙제가 있다. 이번에는 원하는 문화생활을 하고 보고서 써오기. 박람회도 좋고, 음악회도, 영화관도, 축제에 참여하는 것도 모두 자유다. 두 소년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고민한 끝에 한 가지를 고를 수 있었다.

 

   "야구장 가자."

 

   기왕이면 배구 경기를 보고 싶었지만 프로배구 시즌은 지났기 때문에 대신 야구를 보러가기로 했다. 구기종목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배구와 공통점이라곤 없지만 음악회 같은 건 정말 문외한이고, 미술관은 이미 전에 한 번 다녀왔다. 영화관은 여름답게 호러영화 같은 게 한창 걸려있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빼다보니 나온 결과였다.

 

   특별히 응원하는 팀은 없어서 가장 가까운 경기장의 가장 가까운 경기 날에 만나기로 약속했다.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저마다 지갑에 용돈을 두둑하게 채우고 약속장소에서 만나 함께 이동했다. 경기장은 아직 경기 시작 전인데도 미리 도착한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예매한 티켓으로 경기장 안에 입장한 히나타와 카게야마 두 사람의 손에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군것질거리들이 잔뜩 들려있었다.

 

   "와-, 시작한다."

 

   선수들이 모습을 보이고 경기장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간다. 히나타도 서서히 들뜨고 있었다.

 

   히나타는 야구나 축구, 농구 같은 건 기본적으로 지식이 있지만 그래도 경기장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들떠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반면 카게야마는 그냥 정면만 보고 앉아있다. 돌부처 같은 모습에 히나타가 카게야마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아니. 그건 아닌데. …이제 뭐 해야 하냐?"

 

   멀뚱하게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소년에게 히나타는 간단하게 답을 내려주었다.

 

   "음… 그냥 다른 사람들이 환호할 때 같이 환호하고 응원 풍선 흔들면 같이 흔들면 될 거 같은데? 그냥 카게야마가 하고 싶은 대로!"

   "쉽네."

 

   카게야마는 히나타와 같이 산 막대풍선을 흔든다. 무뚝뚝한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한 풍선이 어우러져서 왠지 즐겁다. 하늘도 새 파랗고,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에 함께 기분이 들뜨는 것이다.

 

   카게야마는 내내 웃고 있는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경기장보다 히나타를 더 많이 볼 정도인데, 분위기에 들뜬 히나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4.5.

   "어?"

   경기의 쉬는 중간에 야구장의 전광판이 관객을 비춘다. 관객들 사이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쉬고 있던 히나타는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의아해져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전광판 가득 키스하는 커플의 모습을 발견하고 볼이 뜨거워졌다.

    그때 카게야마가 히나타의 어깨를 움켜쥔다. 체온보다 먼저 카게야마의 향이 히나타의 코끝에 닿았다. 약간 서늘한 계통의 향기가 난다. 히나타는 화들짝 놀라서 움찔 굳어졌다. 카게야마의 입술이 귓가에 다가온다.

   '히익…?!'

   귓가에 닿도록 가까웠다. 어깨가 붙들려서 도망칠 수도 없다. 그대로 얼어버린 것처럼 바짝 굳어진 히나타의 귓가에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온다. 귀 안쪽으로 숨결이 닿았다. 솜털이 쭈뼛 선다.

 

   "저건 뭐하는 거냐? 왜 저런 걸 보여줘?"

 

   그제야 히나타의 어깨에 힘이 빠졌다. 뭔가를 물어보려는 거였구나. 한창 시끄러운 경기장이다 보니 대화를 하려면 소리를 지르거나 아니면 서로 몸을 가깝게 해야 하니까. 깜짝 놀랐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직도 심장이 마구 뛰었다. 반쯤 안긴 모습으로 아직도 귓가에 닿을 것 같은 입술을 피해 히나타는 도망치듯 몸을 뒤로 물렸다. 손에 쥔 플라스틱 부채를 파닥거린다.

 

   "…키스타임이잖아."

   "그게 뭔데."

 

   푸른 색이 감돌정도로 검은 카게야마의 눈동자가 히나타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자리가 너무 가까웠다. 바로 옆이라서 서로의 얼굴이 너무 가까운 느낌이다. 히나타는 왠지 긴장해서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나도 처음 보는 거라 잘은 몰라. 야구장에서 하는 이벤트 같은 건데…. 카메라가 아무 커플이나 전광판에 저렇게 찍으면 거기 나온 사람 둘이…. 음. 저런 걸 하는 거야."

 

   히나타는 목소리 끝을 조금 떨고 말았다. 목소리를 떨었다는 걸 눈치채버리면 어쩌지. 당황을 감추고 싶어서 팔락팔락 부채를 부친다. 바람이 히나타의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팔랑팔랑 흔들며 빠져나갔다. 카게야마는 그 오렌지색 머리카락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따라간다. 또렷한 오렌지색이었다. 맑고 선명한 색이 햇살 아래에서 눈이 부실 정도다. 땀이 살짝 젖어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동그란 이마와, 딴청을 부리며 괜히 경기장에 고정한 눈동자, 솜털이 가시지 않은 뽀얀 목덜미까지 카게야마의 시선이 닿는다.

 

   "그냥 아무렇게나 찍었다가 사귀는 사이가 아니면 어떻게 되는데?"

   "글쎄, 그럴 땐 진짜 싫으면 그냥 아니라고 표시를 하거나 그냥 장난삼아 하거나 그럴걸. 나 인터넷에서 본 적 있는 거 같아. 남자끼리 왔다가 장난으로 그냥 뽀뽀해버리는…"

 

   말하니까 딱 우리 이야기다. 히나타는 얼른 말을 돌렸다.

 

   "하여간 아 이제 다시 시작한다! 경기나 보자 카게야마!!"

   "어."

 

   다행히도 카게야마는 순순히 히나타의 뜻에 따라준다. 히나타는 안심해서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직도 얼굴이 뜨거웠다.

 

 

 

5.

   기말고사.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

 

   히나타는 창백한 얼굴로 책 위에 머리를 박는다.

 

   "우욱, 나, 토할 거 같아."

 

   돌아오는 건 현실적인 반응이었다.

 

   "토할 거면 화장실가라. 보게."

   "너무해!"

 

    여전히 낙제점에서 아슬아슬한 두 사람은 시험을 앞두고 함께 공부를 하러 모였다. 야치에게 특훈을 받았지만 머릿속에 그것을 집어넣는 건 직접 노력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주말을 이용해서 모처럼 책상에 앉은 것이다.

 

   오늘은 카게야마의 부모님은 맞벌이에 일이 바쁘신지 자주 출장을 나가셔서 덕분에 카게야마의 집에서 공부를 하기로 했다. 카게야마가 집으로 초대해 준 건 처음이라서 들떴었는데 역시 공부는 어디에서 해도 죽을 맛이다. 덕분에 생각보다 깨끗하고 멋진 집에 대한 놀라움도 카게야마 방을 구경하며 즐거웠던 기분도 저 멀리 사라진지 오래.

 

   책상 위에 한쪽 볼을 기대고 엎어진 히나타를 카게야마가 빤히 내려다본다. 언제 봐도 동글동글한 뒤통수였다. 딱 자신의 한 손바닥 안에 잡힌다는 것을 이미 카게야마도 알고 있다. 아이언클로를 먹이느라 몇 번이고 잡아봤으니까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토스 올려줄까?"

   "우웃~! 그거 무지 좋지마안…!"

 

   히나타는 뺨을 책위에 부비부비 문지르며 강아지처럼 낑낑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벌떡 일어나 얼굴을 감싸며 절규하는 것이다.

 

   "아으으으~! 하지만 안 돼!! 나, 카게야마가 올려주는 토스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스파이크를 치고 싶어지는 걸! 절~대 공부 못할 거라고!"

 

   카게야마의 눈이 커진다. 기운이 다 빠진 것처럼 털썩 주저앉아 두 팔 위로 얼굴을 묻은 히나타는 낑낑거리며 슬퍼했다.

 

   "으으, 모처럼 카게야마가 먼저 토스 올려준다는데…."

 

   아깝다…. 진짜 아깝다…. 하지만 이번에는 타나카의 누님도 바빠서 작년처럼 이 괴짜콤비를 차로 태워주는 일 같은 건 무리이기 때문에 정말 낙제 같은 건 해서는 안됐다. 히나타는 비통해보일 정도로 아쉬워했다.

 

   그렇게 웅크린 히나타의 뒷목에 조금 끝이 단단한 손가락이 닿는다.

 

   '…?!'

 

   부드럽게 뒷목을 타고 올라간 손가락이 뒷머리를 쓰다듬어왔다.

 

   "…!…."

 

   섬세하게 히나타의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들어온 다섯 개의 긴 손가락이 부드럽게 두피를 만지작거린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다. 평소의 무뚝뚝하고 둔한 태도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럽게.

 

   놀랐지만 싫지 않다.

   히나타는 입안에서 터지는 작은 숨을 토해냈다.

 

   카게야마의 이름을 부른다거나, 뭐하는 거냐고 물어버리면 손을 빼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히나타는 얌전히, 평소의 일인 것 마냥 그 손바닥 아래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것이다.

 

   그런 히나타의 모습에 안심한 듯 처음엔 손끝만 닿아오던 것이 천천히 손바닥 전체로 밀착한다. 미지근한 체온을 품은 단단한 손바닥이 뒷목부터 뒤통수까지 느리게 쓰다듬어온다. 깨지는 것을 어루만지는 것 같은…. 히나타는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쓰다듬을 받는 입장이었다. 친구들도 심심하면 히나타를 쓰다듬어댄다. 그것에 특별히 의식해 본 적 없는데 카게야마가 만지는 느낌은 어쩐지 다르다. 이런 짓을 할 것 같지 않은 녀석이라 그런 건가? 어쩐지 간질간질한 스킨십에 히나타의 귀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보게."

 

   평소에 말을 많이 하는 히나타는 말을 참고 있는데, 오히려 카게야마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시험 끝나면 지쳐 쓰러지도록 토스 올려 줄 테니까."

 

   느슨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손바닥을 느끼면서 히나타는 말없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냥 공부하느라 지쳐서 말할 힘도 없는 척 눈을 감는다.

 

   카게야마가 다른 손으로 리모컨으로 거실의 텔레비전을 켜면서 히나타의 귓바퀴를 정말 아주 살짝 문질러왔다. 텔레비전의 소음으로 정신을 분산시키면서,

 

   "오래 했으니까 조금만 쉬자."

 

   히나타의 귓불을 엄지의 끝으로 느리게 더듬는다. 이걸로 히나타는 카게야마가 의도적으로 자신을 만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역시 싫지 않았기 때문에 히나타는 얌전히 받아들인다. 아니, 오히려 카게야마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자신을 만져주는 쪽이 좋았다. 어째서? 라는 의문보다…. 그냥.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다.

 

   카게야마의 손은 긴장되지만 안심할 수 있다. 그의 손은 언제나 히나타에게 맞춘 완벽한 토스를 올려주는 손이고 투닥거리며 싸우긴 해도 결코 히나타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손을 더 원하게 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야. 히나타는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음량을 낮춘,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이 거실을 채워준다. 심장이 요동친다.

 

 

 

6.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도시락 반찬을 꾸준히 나누어주고 있었다. 2학년 거의 초반부터 그랬으니까 카게야마도 도시락 반찬을 받는 대신, 과일을 나눠주거나 귀가할 때 히나타 손에 고기만두 하나라도 더 사다 쥐어주고 있었다. 집에도 찾아가기도 하고, 초대하기도 하고. 이젠 히나타와 카게야마를 아는 사람들 중에는 괴짜 콤비라는 용어 대신 종종 괴짜 부부라고 부르며 놀려대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부부라니 대체 어디가. 그냥 작년보다 좀 더 가까워진 정도일 뿐인데!

 

   히나타는 젓가락으로 알끈을 제거하며 내심 투덜거렸다.

 

   "간장."

   "응, 고마워."

 

   히나타의 앞으로 간장 병이 내밀어졌다. 그것을 받아 신선한 달걀이 올라간 윤기가 흐르는 따끈한 쌀밥위로 취향껏 뿌려준다. 히나타가 도로 카게야마에게 간장 병을 넘겨준다. 카게야마는 간장을 조금 덜 친다. 히나타는 간장과 계란, 밥뿐인 심플한 것을 좋아하지만 카게야마는 김가루라던가 명란젓 같은 간이 들어간 부재료를 좀 더 추가하는 편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이든 따끈따끈한 미소시루에 간장계란밥은 최고라고 생각한다. 껍질을 바삭하게 구운 연어구이와 과일 샐러드도 함께였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미리 신호를 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눈을 맞춘 것도 아닌데 동시에 한 목소리로 인사를 한 두 사람이 저마다 젓가락을 들어 올려 식사를 시작한다.

 

   "히나타랑 카게야마는 정말 언제 봐도 사이좋다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야마구치가 감탄했다.

 

   "3년이나 붙어 지내면 카게야마랑 저렇게 친해지는 걸까?"

 

   킨다이치가 단호하게 부정한다.

 

   "아니아니아니, 그냥 카게야마에게 히나타가 유달리 잘 맞는 쪽이겠지. 붙어 지낸 건 우리도 3년이라고."

 

   쿠니미도 대답했다.

 

   "이하동문."

 

   키타이치 제1 중학교는 배구명문으로 제법 빡빡하게 꾸려진 일정을 자랑한다. 그래봤자 중학교지만 그 빡빡하게 짜인 일정 속에서 협동심, 단결력을 다지기 위해 상당히 많은 시간을 들이는 편이었다. 그 3년을 지내면서 가까워질 시간은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 수많은 협동심 양성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카게야마 토비오는 누군가에게 가까워져 본 적이 없다. 중3때 그 시합에서 크게 싸우기 이전에도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배구 이외의 요소를 뺀 '인간'에 대한 관심이 있기는 하느냐고 의문을 느꼈을 만큼, 카게야마 토비오는 모두에게 무신경했다.

 

   인간은 관계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다. 사회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면 괴로워하고 고민하게 된다. 특히 감수성이 풍부하고 또래집단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청소년기라면 더욱 그렇다.

 

   보통의 중학생이라면 선배인 오이카와가 그렇게 놀려대고 싫어하면 미움 받는다는 생각에 위축되기 마련이었다. 후배들이 자신만 겁내고 피하면 마음이 편치 않고, 동료들의 굳어진 태도가 신경 쓰인다. 보통은. 그런데 3년 내내 카게야마 토비오가 인간관계에 신경 쓰는 일이라곤 없었다. "카게야마에게 필요한건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졸'이다. 자신이 이기기 위해 필요 없는 것은 '휙'", 이라고 이야기했었던 것은 단순히 흉보기 위한 말이 아니라 킨다이치의 진심을 품은 것이기도 했다. 상대방이 생각과 감정을 품은 살아있는 인간임을 알고 있다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선배가 짜증을 내도, 동료가 싫은 기색을 보여도 그 탓에 카게야마의 컨디션이 흐트러지는 것을 본 적 없다. 있다면 오직 한번, 배구코트위에서 동료로서 거절 당했을 때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킨다이치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때 생각하면 지금 저 모습은 정말 경이롭지."

 

   표현하자면….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다. 그 정도로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눈을 못 떼고 있었다. 히나타가 무언가 말할 때마다 반응을 되돌려준다. 놀랍다.

 

   "히나타 연애는 하겠냐? 맨날 저렇게 붙어 사는데."

   "히나타가 내년에 대학 쪽으로 진학하고 카게야마는 프로 쪽으로 가면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긴 학교 다닐 때는 미우나 고우나 매일 같은 학교에서 얼굴 보니까. 카라스노 공식 부부도 헤어질 때가 오는 걸까."

 

   그렇게 오가는 세죠의 대화 사이에서 조용히 식사하던 츠키시마가 문득 떠오른 듯 말을 얹었다.

 

   "하긴…. 확실히 달라질 것 같지. ‘멀어지고 난 다음에야’…."

   "츳키?"

   "어?"

   "아니. 아무것도."

 

   츠키시마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7.

   고등학교의 졸업을 앞둔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영화관에 가기로 했다. 어디 함께 여행을 다녀온다거나 하는 건 카게야마가 곧 프로팀에 입단해서 시간 빼기가 어렵다. 히나타는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대학에서 배구를 꾸준히 하면서 노력해볼 생각이다. 비록 자리는 달라졌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기로 했다.

 

   “아, 그런데 볼만한 게 그다지 없네.”

 

   히나타는 아쉬워했다. 그냥 충동적으로 영화보자고 나왔더니 볼만한 게 없다. 시간대도 맞는 걸 찾기 어렵고, 덕분에 두 사람은 아무렇게나 가장 가까운 시간대의 영화로 표를 두 장 끊어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카라멜맛 맛있다.”

“응.”

 

   광고가 올라온다. 히나타는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면서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고른 영화는 로맨스 영화였다. 그리고 상상이상으로 몹시 재미없었기 때문에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굳어진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지간하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재미있게 봐주는데, 집중력이 초단위로 흩어지는 걸 느낀다. 앉아있으려니 시간 낭비하는 기분이고 이런걸 돈 주고 샀다니 돈이 아깝다. 한마디로 돈 주고 시간을 버리고 있는 중이다. 히나타는 졸음을 참으면서 전투적으로 팝콘을 우물거렸다.

 

   ‘자꾸 눈물을 뽑아내려는 듯 슬픈 상황을 억지로 쑤셔 넣었는데 대체 영문을 모르겠고…. 재미없고….’

 

   달콤한 팝콘을 오물거리며 히나타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순간 눈을 떠 보면 화면이 바뀌어 있다.

 

   “…?!”

 

   히나타는 소리도 내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 너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스크린 가득하게 반쯤 벗은 거나 다름없는 모습의 남녀가 쪽쪽거리고 있었다. 히나타는 주변을 살펴본 다음에야 자신이 앉아있는 곳이 영화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허겁지겁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다. 분명 로맨스 영화를 샀지만 15세였는데?

 

   ‘으, 으와아아아아….’

 

   언제 끝나…. 대체 언제까지 할 셈이야…. 아니, 손이 어디로 가는…. 앗, 안 돼, 그만! 15세가 아니잖아요! 히나타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물들었다.

 

   “히나타, 괜찮냐?”

   “힉. 카, 카게야마.”

 

   맞다, 카게야마도 있었지. 히나타의 얼굴이 더 붉게 타올랐다. 친구랑 이런 걸 뻔뻔하게 관람하는 취미 같은 건 없다. 이성에게 관심 없는 건 아니지만 친구와 그런 대화를 나누는 건 좋아하지 않고, 야한 걸 같이 보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카게야마. 카라스노 배구부 중에서 성적(性的)인 것이든 이성에 대한 것이든 관심이라고는 전혀 보인 적 없는 카게야마. 히나타는 엄청나게 부끄러워졌다.

 

   “괘, 괜찮아.”

   “놀란 것 같던데. 콜라줄까?”

   “응….”

 

   그 와중에도 빵빵한 음향기기를 통해 끊임없이 쪽쪽거리는 소리가 배경으로 깔리고 있었다. 키스장면을 강조하려는 의도인지 배경음악은 최소한으로 낮춘 듯 잔잔하고, 영화관 안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사람 자체가 몇 없으니까…. 히나타는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이다.

 

   “기분 좋아 보이네.”

 

   문득 카게야마가 말한다. 히나타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어?”

   “저 사람들. 기분 좋아 보인다고.”

 

   히나타의 눈이 스크린으로 향한다. 입을 부비고 있고, 서로를 얼싸안고 있고, 확실히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연기겠지만.

 

   “그…렇네.”

   “저게 좋은 건가?”

   “그, 글쎄? 나도 해본 적 없어서 몰라.”

 

   히나타는 카게야마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단 게 어쩐지 이상하고 어색해서 참을 수가 없다. 히나타는 괜히 손안에 쥔 콜라 잔을 만지작거렸다.

 

   “안 해봤냐?”

   “으윽~ 나도 내가 인기 없는 거 알거든?”

   “뭐? 아니, 오히려 반대인데. 너는…. 네 주변엔 항상 많으니까.”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너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이."

   카게야마의 얼굴이 스크린의 불빛에 비쳐 보인다. 카게야마의 시선이 어쩐지 긴장하게 만들었다. 히나타는 목 아래서부터 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무, 무슨 말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친구라구. 친구랑, 입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달라. 우정과 신뢰랑, 가족 간의 사랑이랑, 연인 간의 사랑은 차이가 있잖아."

   "…그러냐?"

   "그, 그런 거야."

   카게야마가 히나타를 빤히 바라본다. 히나타는 여기서 눈을 피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하지만 등 뒤로는 식은땀이 다 나는 기분이었다. 잠시 히나타를 바라보던 카게야마가, 이내 영화관 좌석에 등을 깊이 묻는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쩐지 이건, 카게야마가 져 준 것 같다. 잘은 모르겠지만. 말도 안 돼. 카게야마가 남에게 여유 있게 어른스러운 느낌으로 져 줄 수도 있는 인간이었어? 내가 아는 카게야마는 그런 애 아닌데?

   "너…누구야? 내 카게야마는 어디 갔어."

   히나타가 오들오들 떨며 묻는다. 카게야마는 말없이 히나타의 머리통을 잡고 짤랑짤랑 흔들어주었다.

 

 

 

6.5

   "그래도 많이 큰 거 같다, 너."

   "뭐?"

   "나, 너라면, 배구랑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그럴 리가 있냐, 멍청아."

   카게야마는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히나타를 바라본다.

   그렇게 말하는 히나타는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카게야마도 웃고 말았다.

 

 

 

7.

   [너 그거 아냐?]

   [뭔데?]

   [남자끼리 혹은 여자끼리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연구가 있다고. 뉴스에서.]

   [헉 Σ(゚ロ゚) 진짜?]

   [알파오메가 연구라고 하던가. 그렇다더라]

   [그렇구나~ 재미있네. 그럼 미래에는 같은 성별끼리 결혼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연구가 성공한다면 아마]

   [굉장하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카게야마 군, 평범하게 뉴스도 보는구나? 역시 사회생활하면 좀 다르구나. 배구 선수들 뿐이니까 또 배구만 할 줄 알았는데...다양한 것들을 접해가는 것 같아서 형아는 기뻐요! 기특하네!(๑˃̵ᴗ˂̵)و]

   [죽는다 진짜]

 

8.

   [첫 공식전 축하´▽`! 경기장 가고 싶었는데, 미안 。゚(。ノωヽ。)゚。]

   [괜찮아]

   [하지만 경기는 봤어! 멋있더라 야!]

   [괜찮았냐?]

   [당연하지! 뭐, 우리가 같은 팀이었을 때가 제일 멋있지만! 흠 역시 넌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8.5

   [맞아]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거 맞아]

 

 

 

 

9.

   '그, 그런 문자는 반칙이었어.'

 

   히나타는 생각한다. 그건 진짜 반칙이었다. 동갑에, 히나타보다 한 뼘 넘게 더 큰 주제에 애틋한 보호본능을 자극하다니 이건 반칙이야. 아직 어린 여동생이 있는 히나타는 연하의 상대에게 약했다. 후배에게도 약하고, 어린 아이에게도 약하고, 거기다가 누군가를 챙기는 일을 번거롭고 귀찮다고 느끼지도 않는 성격이다. 기본적으로 히나타 쇼요는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을 거리끼지 않는 선량한 성품의 소유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온 건 좀 창피하고!

 

   히나타는 냄비 속을 국자로 휘휘 저으며 외쳤다.

 

   "이건 말이야! 네가 하도 날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특별히 와 준 거니까, 고마워하라고 카게야마!"

 

   방학을 이용해 카게야마가 자취하는 도쿄까지 올라왔다. 교통비에 시간까지 들였으니 이 정도의 큰소리는 쳐야 수지가 맞는다. 옆에서 음식을 담은 접시를 옮기면 카게야마가 느슨하게 웃어보였다.

 

   "그래."

   순순한 대답에 히나타가 오히려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뭐, 하룻밤 재워 주는 거는 고마워..."

   "아니. 날 보러 와준 거니까 그 정도는 해줘야지. 이 정도야 얼마든지."

   "……."

 

   히나타는 국자를 떨어트릴 뻔 한다.

 

   …한동안 못 본 사이에 카게야마는 뭔가 좀 달라진 것 같다.

 

   하긴, 작년까지만 해도 매일 봐 왔는데 올해 들어서는 반 년 만에 처음이니까. 히나타는 식탁위에 샐러드 접시와 앞 접시를 내려놓는 카게야마의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텔레비전으로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텔레비전으로 보는 거랑 실물은 역시 다른 것이다.

 

   그릇에 돈지루를 적당히 나누어 담아 건네준다. 갓 지은 밥도, 보들보들한 계란말이도, 냉두부와 돼지고기 생강구이도 식탁 위에 올린다. 두 사람은 식전인사를 올리고 젓가락을 들어올렸다. 히나타는 돈지루를 마셨다. 좋은 돼지고기에서 우러난 맑은 기름으로 감칠맛이 돈다. 충분히 익힌 뿌리채소들을 오물오물 씹어 먹으며 시선을 들어올렸다. 카게야마도 식사를 하고 있다. 고교 2년 내내 함께 밥을 먹어온 만큼 두 사람의 식사는 아무런 대화가 없어도 어색함이 없다. 오히려, 그 침묵이 평화로울 정도였다. 히나타는 샐러드의 방울토마토를 오물거리며 카게야마를 올려다본다.

 

   '분위기도 좀 달라졌어.'

 

   대학생이 된 히나타와는 달리 카게야마는 바로 프로배구세계로 향했다. 말하자면 이미 사회인이라는 것이다. 자신이 쓸 돈을 벌고, 세금도 내고. 그 때문인 건지 고교생 때랑은 다른 분위기가 카게야마를 감싸고 있었다. 더 어른스럽고,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이다. 생전 외모에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 머리도 멋지게 세팅해서 반쯤 이마를 드러낸 모습이었다. 낮에 밖에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음…. 키도 더 큰 거 같네.'

 

   사람이 콩나물도 아니고 왜 자꾸 크는 거지. 히나타의 미간이 좁혀진다. 졸업 때는 이미 190센티 가까웠는데 그때보다 머리가 더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큰 키에다가 옷도 세터혼 같은 웃긴 글이 적히지 않은 제대로 된 셔츠에 바지를 입고 있으니까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만큼 근사했다. 아직은 더 실력을 다듬는 중인지, 베테랑 선수들이 1군으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 경기에 많이 출전하지 않지만 그 몇 번의 출전만으로도 조금씩 배구 팬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는 걸 히나타는 느끼고 있었다.

 

   올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카게야마는 분명 레귤러가 될 것이다. 카게야마의 재능은 어디 구석에서 혼자 썩기에는 너무 눈부시니까. 그러면 이렇게 둘이서 함께 하는 시간도 아마 없어지겠지.

 

   외롭다.

 

   히나타는 문득 가슴 속이 뻥 뚫리는 것같이 허전해진다. 함께 하지 못한 지 고작 반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멀게만 느껴지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외로워지는 거지. 카게야마는 그냥 제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이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히나타도 카게야마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그래서 함께 배구를 하자고….

 

   카게야마가 자신보다 몇 발짝이나 더 멀리 앞서 나가있어서? 그래서 못 따라잡을까봐 두려운 걸까?

 

   히나타는 마른 모래처럼 버석버석한 밥을 씹어 삼킨다.

 

   그런 열등감 때문일까, 이 가슴을 안타깝게 죄여오는, 외로움은.

 

 

9.5.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오랜만에 투닥거리며 입씨름을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가 자취하는 맨션은 도쿄 한복판에 자리한 혼자 살기엔 조금 널찍한 2LDK였지만 방 하나는 그냥 옷장 및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창고로 쓰고 있었기 때문에 히나타가 잘 곳이 마땅히 없었던 것이다.

 

   당연히 히나타는 거실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다. 상식이 있다면 당연한 선택이다. 집주인의 침실은 당연히 집주인이 써야하는 것이다. 거긴 프라이빗한 공간이니까. 그런데 이 바보 카게야마는 당연하다는 듯 히나타에게 침실을 내어주겠다는 것이다.

 

   "아니, 나는 그냥 소파에서 자도 좋다니까, 카게야마!"

   "내가 싫어."

   "아니 나도 싫어!"

 

   아무리 친한 카게야마라지만 이 정도로 프라이빗한 것까지 공유하는 건 아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끼리나 허용되는 수준이잖아. 히나타는 단호하게 입을 꾹 다물고 소파에 발라당 누워버렸다. 안가, 못가, 배째의 의미를 담은 포즈다.

 

   그러자 카게야마도 초강수를 던졌다.

 

   "우왁?! 야! 야!"

 

   히나타의 허리에 카게야마의 팔이 감기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히나타는 허공에 들어 올려져 있었다. 이, 이런 방식이라니?! 기겁한 히나타를 껴안아들고 카게야마가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가 히나타를 침대위에 내동댕이쳤다. 히나타는 흐갸아아아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침대위로 나동그라졌다.

 

   "우와, 어지러워…!"

 

   정신이 없다. 수면등 하나만 밝혀진 어두운 방안, 침대에 엎어져서 끙끙거리는 히나타의 위로 이불이 둘러지더니 그래도 히나타를 김밥처럼 데굴데굴 말아버렸다. 꼼짝도 못하고 묶이게 된 히나타는 황당해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야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풀어줘!"

   "싫어."

 

   커다란 김밥이 된 히나타를 카게야마가 두 팔로 와락 껴안는다. 그걸로 모자라서 히나타 몸 위에 다리까지 척 올려놨다. 히나타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이게 뭐하는 거지요?! 이거 뭐하자는 거지요 카게야마군?!

 

   "손님이 집주인 침대를 차지하면 안 된다고 한 거지?"

   "그, 그렇지…? 그러니까 이거 풀어주면 안 될까요 카게야마님?"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오히려 히나타를 자기 품으로 꼭 끌어안는다. 히나타는 폐에 찬 공기를 쿨럭 토해냈다. 억 나 죽는다.

 

   "그렇다면 두 사람 다 여기서 자면 되는 거지?"

   "아니 뭐 이런 게 다 있냐?! 이 고집불통! 바보!"

   "잔다."

   "악 아프다고! 팔에 힘 풀어 바보!"

   "이렇게 잔다고 약속하면 풀어줄게."

   "잘게요! 잘 테니까!"

 

   억지로 히나타에게 약속을 받아낸 카게야마의 팔에 그제야 힘이 풀린다. 숨통을 죄는 팔에 간신히 풀려난 히나타가 가쁘게 숨을 골랐다.

 

   "죽는 줄 알았어…."

   "많이 아파?"

   "죽겠다 야."

 

   강하게 끌어안았던 팔이 이번에는 다정하게 히나타를 끌어안아온다.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품 안에서 서늘한 냄새를 느꼈다. 멘톨계열의 향기, 체육관에서 나는 파스 냄새도 옅게 풍기고, 옅은 향수냄새 같은 것도 난다.

 

   "파스냄새…."

   "아. 너무 독한가? 샤워했는데."

   "아니, 아니 좋아해. 나 파스냄새 좋아한다고 했잖아."

 

   히나타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코를 킁킁거렸다. 히나타의 얼굴이 풀어진다. 제 품 안에서 말랑말랑하게 녹은 히나타의 얼굴을 카게야마가 바라보았다.

 

   "기억 나? 전에 여름에…. 야구장 갔을 때."

   "……."

   "너한테서 이 냄새 났었는데."

   카게야마의 목울대로 마른 침이 넘어간다. 꼼지락 거리던 팔이 히나타를 다시 꼭 끌어안았다.

 

 

 

 

10.

   카게야마가 먼저 어디에 가자고 제안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아니, 사실상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게야마가 생각보다 어디 놀러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오랜만이다, 그렇지?"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야구장의 관중석에 앉아있었다.

 

   미야기까지 내려온 카게야마는 야구를 보고싶 다고 한 것이다. 올해 배구시즌도 끝나고 잠시 여유 있는 틈을 탄 휴가였다. 시즌을 마치고 나서 카게야마의 인기는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크게 상승했다. 배구 팬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하고, 잘생긴 외모 덕분에 일반인들에게도 꽤 입소문을 탔다. 그래봤자 신인이었기 때문에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편하게 간식도 까먹고 응원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카게야마가 먼저 제안해 준 일은 기뻤다. 덕분에 히나타는 평소보다 더 들뜬 상태였다. 열심히 막대풍선을 마구 흔들면서 응원해대는 모습을 카메라맨들이 유심히 보기도 했다. 노느라 정신없는 히나타는 몰랐지만.

 

   그러니까 키스타임 때 카메라가 히나타를 찍은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전광판에 자신과 카게야마의 얼굴이 나타난 것을 본 히나타가 기겁했다.

 

   "우, 우리?"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히나타가 팔딱거리는 모습에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카게야마, 이거 뭔가 잘못된 거 같아. 그렇게 히나타가 당황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돌아볼 때였다. 카게야마가 히나타의 어깨를 움켜쥔다. 체온보다 먼저 카게야마의 향이 히나타의 코끝에 닿았다. 히나타는 고등학교 2학년 그 날의 여름을 떠올린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바닥이, 히나타의 두 볼을 감싸 쥐었다. 히나타의 양 뺨을 부드럽게 감싸고, 그리고 얼굴이 다가왔다. 거부할 수 없었다. 히나타는 자신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고 만다. 입술위로 부드러운 것이 지그시 꾹 눌러진다. 와아아 요란한 관객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첫 키스였다.

 

 

 

 

10.5.

   "아~ 재밌었다. 그렇지?"

 

   히나타는 필사적으로 웃고 있었다. 웃다보니까 또 괜찮아지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야구경기장의 키스타임에는 그런 해프닝도 일어나는 것이다. 친구끼리 왔다가 장난스럽게 뽀뽀하는 일 정도야, 재미있는 소동일 뿐이다. 언제 한 번 추억으로 몇 번 입에 담을만한.

 

   카게야마는 분명 그런 의미였겠지. 엄청나게 놀라버렸지만, 카게야마는 원래 남 눈치 안보는 녀석이니까 옛날에 히나타가 이야기 해 준대로 그냥 냅다 뽀뽀해 버린 것이다. 입술을 떼어낸 순간 본 카게야마의 얼굴은 답지 않게 장난스러운 미소가 묻어나 있었다. 장난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는 심술궂은 얼굴이었다. 히나타는 기가 막힌다. 카게야마 녀석…. 참…. 소중한 첫 키스가 히나타 쇼요인걸로 좋은 건가요, 이 멍청이.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네.

 

   '아, 아닌가. 첫 키스 아닐 수도 있는 건가.'

 

   카게야마는 벌써 2년차의 배구선수다. 그 시간동안 떨어져 지냈으니까 모르는 사이에 키스정도는 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걸 문득 떠올리자 심장이 따끔하고 아프다. 히나타는 그 통증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했다. 그보다 즐거웠으니까 된 거다.

 

   "우리 또 오자!"

   "그래."

   "앗, 고분고분 좋다고 말하더니 너도 재밌었던 거지? 그렇지요, 카게야마군?!"

 

   히나타가 키득거리면서 카게야마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카게야마가 아, 아파하며 엄살을 부렸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건 아닌데."

   "?! 뭐? 너 재미없었어…?"

 

   분명 즐거워보였는데? 히나타는 들떴던 얼굴 그대로 멈춰 섰다. 내내 눈도 마주쳤고, 분명 재밌었다고 생각했는데? 놀라고 당황한 히나타는 굳어져 있다. 히나타의 당황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카게야마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천천히 말을 고른다.

 

   "뭐. 재미있다라기보단…. 그냥 네 얼굴을 구경하는 건, 괜찮으니까."

 

   히나타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렇단 건, 그러면, 내가 원하기 때문에 함께 어울려주었다는 이야기인가?

 

   나와 있는 시간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그저 친구인 히나타 쇼요가 바라는 것이니까 견뎌준 것뿐.

 

   "뭐, 뭐야, 내 얼굴이 웃기단 이야기야? 바보 카게야마!! 너랑 안 놀아! 나쁜 놈아!"

   "때려봤자 하나도 안 아픈데."

   "아니 이놈이?!"

 

   부끄러웠다. 카게야마도 자신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거웠을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한 자신이 너무 창피하다. 카게야마에겐 이런 ‘쓸데없는 시간’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아버린다.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아버렸다.

 

   카게야마 토비오를 좋아한다.

 

   그래서 이런 쓸데없는 시간들이 너무 즐겁고, 좋았던 것이다. 땅 밑으로 꺼져버리고 싶다. 히나타는 자신의 속알맹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어린아이같이 유치한 모습으로 삐진 모습을 필사적으로 연기한다. 도쿄로 돌아가기 위해 헤어지는 카게야마를 배웅할 때까지 히나타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11.

   히나타 쇼요는 카게야마 토비오를 좋아한다.

   그 엄청난 진실을 깨달아버리고 히나타는 신나게 땅을 팠다.

 

   친구들이랑 노는 것도 즐겁지만, 카게야마랑 있는 게 더 즐거웠다. 카게야마가 자신과 가깝다는 걸 자각하면 기분이 좋았고,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여자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고 우는 소리를 해도 같이 고민은 해줬지만 정작 히나타 스스로는 별로 외롭거나 허전함을 느껴본 적 없다. 야구장에서의 갑작스러운 키스가 당혹스러웠을 뿐 불쾌함은 없었던 것도 전부 하나로 설명된다.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자신이 어이없을 정도였다.

히나타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럴 수가, 나 이렇게 바보였어?'

 

   뒤늦게 깨달은 진심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히나타는 자신이 둔하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갑자기 자기 자신이 의심되기 시작한다.

 

   그런 쪽으로 전혀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탓이 클 것이다. 동성이고, 정말 친구니까.

 

   아니면 히나타 스스로도 가망이 없다고 느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카게야마를 좋아했다. 카게야마가 둔한 녀석이라 다행이다. 다 커가지고 멜로영화의 키스신을 보며 저거 기분 좋아 보이네, 하는 소리나 하는 안 어울리게 순진한 녀석이니까 여태껏 안 들켰지….

 

   "좋아…한단 거구나, 이런 게."

 

   가슴이 두근두근거리는 느낌. 히나타는 가슴 위를 꾹 손으로 눌러본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항상 함께 있을 수 있었고 매 순간순간 충실했다. 그 시간들 덕분에, 히나타는 나름대로 자신이 카게야마에게 소중한 친구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고 있다. 당장 카게야마도 말하지 않았던가. 별로 놀러 다니는 것에 흥미가 없더라도 히나타를 위해서라면 카게야마는 기꺼이 시간을 할애해준다. 그 녀석이 그 정도로 양보해주는데 이게 소중한 사람 포지션이 아니면 뭐냐고.

 

   그러니까 이걸로 충분하다.

 

   "접어야지."

 

   이 마음은 접어야지.

 

   카게야마 덕분에 많이 행복했다. 카게야마도 자신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 없는 사교활동에 같이 어울려주었다. 그 카게야마 녀석이 노력을 했는데 자신이 욕심을 내서 이 관계를 망가트리는 짓을 하고 싶지 않다. 히나타도 카게야마와의 지금의 이 유대관계가 소중하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히나타는 기꺼이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슴의 통증은 어쩔 수 없었다. 히나타는 그 통증에 눈물짓지 않았다. 대신 기꺼이 달게 받아 삼킨다. 이 애정이 히나타의 것이듯, 이 슬픔도 히나타의 것이다. 그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다.

 

 

 

 

12.

   마음을 접겠다고 정하긴 했지만 히나타는 카게야마에게 멀어지려 한다거나 티를 낸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의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접을 정도로 카게야마와 우정을 소중하게 여기는 히나타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이유가 없다.

 

   마음을 정리하는 데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법인데 다행히 히나타는 평범한 대학생, 카게야마는 프로생활중인 선수였기 때문에 거리는 이미 충분히 멀어져있다. 물리적으로. 서로 연락하지 않으면 만날 일도 극히 드물다. 그 기간 동안 히나타는 자신의 마음을 열심히 추스르고 있었다. 쉽지는 않았지만 히나타는 여유 있었다. 천천히 접지 뭐. 라고 방심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히나타와 카게야마는 각자의 생활에 바쁘고, 연락하지 않으면 만날 일이 없다. 방학 때나 한두 번 보면 다행인 것이다.

 

   "카, 카게야마?!"

   "안녕."

 

   히나타가 자취하는 낡은 맨션의 현관문 앞.

   분명 도쿄에 있어야 할 카게야마 토비오는 덤덤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카게야마, 네가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당황하면서 카게야마를 방 안으로 들인 히나타가 물었다. 아직 어안이 벙벙하다. 얘가 왜 여기에 온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야구장에서 만난 지가 얼마 되지도 않았고 한창 훈련에 힘써야할 녀석이 여기까지 왔다니…? 잠시 생각을 이어간 히나타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역시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카게야마가 훈련 대신 하루를 통으로 날리고 자신을 찾아올 이유라는 게 또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히나타는 우유를 전자레인지에 데워 따뜻하게 해서 카게야마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카게야마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괜찮아."

 

   카게야마가 데운 우유를 마신다.

 

   "무슨 일이야?"

   "…그냥, 너 보고 싶어서."

 

   무심하게 던져진 카게야마의 공격에 히나타의 심장이 떨어진다. 표정관리를 못할 것 같다. 얼굴이 빨개졌다는 것을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뜨끈뜨끈한데!

 

  "뭐, 뭐야 날 보려고?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야. 진짜 보고 싶었으니까 온 거다."

 

   …….

 

   잠시 마른침을 삼킨 히나타의 얼굴이 이번에는 정말 진지해진다. 달아올랐던 뺨도 창백해져 있었다.

 

   "…뭐…. 급전 필요해? 조금이라면 나도 알바한 거 저축한 거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 카게야마…."

 

   이미 돈 벌고 있는 카게야마에게 자신의 푼돈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때가 있는 것이다. 히나타는 진지하게 답변해주었다. 카게야마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너 날 뭘로 보냐? 진짜 아니니까 제발 안심해라. 그냥 쉬고 싶어서 온 거야."

   "앗 그렇구나. 다행이다!"

 

  그제야 어깨에 힘이 빠졌다. 히나타의 반응에 카게야마는 떨떠름하게 우유를 연신 넘긴다.

 

   "네 자취방에는 처음 오네. 좀 일찍 놀러와 보려고 했는데."

   "좀 좁지?"

   "아니, 괜찮아."

   "그건 그렇고 놀러올 땐 좀 연락해. 그게 기본 아닌가요, 카게야마 군? 청소도 제대로 안됐단 말이야!"

   "깨끗한데 왜."

   "어제 좀 대청소하느라고. 평소에는 이렇게 안 깨끗해!"

   청소를 안 해놨으면 지금쯤 웃는 게 아니라 수치심으로 다이빙하러 갔을지 모른다. 마음 정리하겠다며 괜히 밤늦게까지 대청소했다는 이야기는 비밀이다. 야구장사건이 바로 며칠 전인 것이다. 차근차근 마음 정 리중이었는데 당사자가 찾아와버리다니 이런 낭패가 다 있나.

 

   '솔직히 좀 기쁘지만.'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아아 역시 마음의 정리 같은 거 아직 안됐어…. 카게야마 이 바보 녀석, 왜 쓸데없이 저렇게 잘생긴 거야. 내가 곤란하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히나타는 자꾸 웃음이 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최소한 좋아하는 티는 자제하고 싶다.

 

   "그럼 그냥 쉬러 온 거야?"

   "어. 그냥 쉬러."

 

   카게야마 입으로 쉰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나랑 있었던 시간, 역시 비록 특별히 신나거나 즐겁진 않아도 싫진 않았다는 거겠지? 그런 게 맞겠지? 히나타는 빙그레 웃었다. 커다란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사르르 미소 짓는다. 누구라도 저도 모르게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는 그런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좋아, 그럼 오늘은 뒹굴뒹굴거리자."

 

   히나타는 커다란 담요를 꺼낸다.

 

   "나 보고 싶었던 영화 빌려왔었거든! 같이 보자!"

 

 

 

12.5

   히나타의 자취방에는 텔레비전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거실하나, 부엌하나, 방하나의 단출한 자취방은 지나치게 작아서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바짝 붙어있어야 했다.

 

   "너 아직도 어린애용 침대 쓰냐…."

   "아 왜! 집이 작아서 작은 침대가 효율이 좋았다구!"

   "대체 여기서 어떻게 사는 거야."

   "혼자 살기엔 괜찮아! 어떻게든!"

   카게야마는 190센티를 육박하는 장신이지만, 히나타는 이제 겨우 170이 간당간당했다. 170이 조금 작긴 해도 그럭저럭 괜찮은 키인데 문제는 스포츠 쪽을 지망하고 있는 탓에 모두에게 꼬맹이 취급받는다.

 

   억울한 얼굴을 한 히나타가 먼저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들어갔다. 거실은 탁자며 책장이며 자리하고 있어서 카게야마가 편하게 뒹굴기에는 장애물이 좀 많다. 차라리 침대 쪽이 발 뻗고 쉬기 좋았다. 비록 어린아이용 싱글사이즈 침대지만.

 

   "눕는 건 좀 무리고 적당히 알아서 잘 해봐."

   "어."

 

   눕는 게 무리였기 때문에 그냥 카게야마는 침대 헤드쪽에 베개를 대고 등을 기대앉았다. 작은 침대에 가볍게 눌리는 느낌이 선명하다. 히나타는 새삼 뭔가 너무 밀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침대가 너무 작고 카게야마는 너무 크다. 싱글사이즈 침대에 성인남자 둘이 올라있으려면 밀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히나타가 최대한 웅크려봤지만 역시 좁다. 엄청나게 좁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크, 큰일이다. 친구텐션에 너무 익숙했어. 내 패착이다.'

 

   친구로서 지낸 시간이 너무 긴 나머지 그만. 히나타의 목으로 마른침이 꼴깍 넘어간다. 굳어진 히나타를 카게야마의 팔이 끌어안는다. 히나타는 끌어안긴 채로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에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안정적으로 자기 다리사이에 앉힌다. 히나타는 혼이 쏙 빠졌다.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신음처럼 뭔가를 중얼거린다.

 

   "으아아…. 와아아아…. 엄마아…. 살려줘…."

   "너네 엄마는 왜 부르냐."

   그러고는 두 팔이 히나타의 배 위를 안정적으로 끌어안는다. 카게야마의 체취와 체온이 동시에 히나타를 덮쳤다!

 

   '죽는다. 죽을 거야.'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체온이 마구마구 상승하는 게 느껴진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카게야마는 히나타를 끌어안은 채 편하게 노트북을 들어 히나타 앞으로 옮겼다. 히나타는 거의 혼이 빠져서 무의식적으로 노트북을 부팅하고 렌탈숍에서 빌려온 영화를 플레이시켰다. 그 과정의 기억이 거의 안 난다. 정신을 차리면 영화의 초반부가 지나가 있었다. 그나마도 카게야마가 건드려서 정신을 차린 것이다.

 

   "히나타."

   "어, 어?"

   "너 몸이 뜨거운데."

   "아~ 음~ 감기기운이 있나봐, 하하하…."

 

   네가 좋아서 열이 났어요 같은 건 죽어도 못 말한다. 카게야마가 고개를 구부려 히나타의 어깨에 머리를 문지른다. 서늘하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목덜미에 닿아서 왠지 오싹오싹해서 기분 좋…다고 생각할 때가 아니다. 얼굴이 뜨거웠다. 히나타는 간신히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야… 근데 너 너무 스킨십 좋아하는 거 아니야?"

   "어?"

   "전부터 생각했는데, 너 은근히 스킨십 잘하잖아."

 

   좋아한다는 걸 자각하고 며칠간 카게야마랑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이기도 했다. 카게야마는 은근히 히나타에게 스킨십을 잘 했다. 어깨를 잡아당겨서 밀착한다거나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껴안고 잔다거나…. 바로 얼마 전에는 키스까지 한 것이다. 순전히 장난이었기 때문에, 감정을 자각하고 난 히나타에게는 즐거울 수만은 없었던 그 일.

 

   친구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앞으로 이제 이런 스킨십은 조금씩 거리를 만들기 시작해야하지 않느냐고 히나타는 판단한다. 다 큰 남자애들끼리 이러면 징그럽다거나하는 말로 적당히 피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오히려 카게야마의 팔에 힘이 더 강하게 들어간다.

 

   "와앗! 왜 더 껴안는 거야?"

   "별로 나 스킨십 좋아하는 거 아니야."

   "안 좋아하긴 무슨, 지금 네가 하는걸 보고 말해라!"

 

   완전 좋아하는구만! 안 그런척하는 얼굴로 태연하게 해버리니까, 히나타 본인도 스킨십을 좋아하다보니 어영부영 지나가는 걸 반복하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이제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때다. 히나타가 벗어나기 위해 힘을 줄 때였다.

 

   "너한테만 하는 거야."

   "…읏…."

 

   이런 점이 분하다. 히나타는 입술을 악물었다. 이러면 마음이 약해져버리는 자신이. 마음대로 두근두근해져버리고. 카게야마가 주는 스킨십이라던가 자신에게만 하는 특별한 행동들이 기분 좋아서 안주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다.

 

   "이런 짓은 애인한테나 하는 거야, 카게야마."

 

   히나타는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서 숨을 차분히 골라야했다.

 

   "그때의 입맞춤 같은 거도. 애인이랑 하는 거야."

 

   그러니까…. 히나타는 괴롭게 눈을 감았다.

 

   "이제…. 그만해."

   "싫어."

 

   …….

 

   "저기, 카게야마. 나 진지하게 이야기한 거거든."

   "나도 진지하다. 싫다고."

 

   히나타는 속눈썹을 가늘게 떨었다.

 

   "아 정말!"

   "보게. 내 말 좀 들어봐."

 

   커다란 손이 히나타의 턱을 덥석 잡더니 고개를 돌려서 눈을 맞추게 한다. 히나타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렸다.

 

   "놔…놔줘."

   "널 안고 있으면 좋아."

   "……?!"

   "네 머리통 쓰다듬으면 부드럽고."

   "무, 뭐?"

   얼어붙은 히나타를 붙잡고 카게야마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그 다음은 대형 폭탄이었다.

   "솔직히 키스하고 싶어."

 

   아웃!

   이건 아웃! 히나타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친구끼리는 키스하고 싶으면 안 돼!"

   "너랑 놀러 가면 네 얼굴만 보게 돼."

 

   어?

 

   히나타의 입이 다물어졌다. 멍하게 카게야마를 바라본다. 이제야 카게야마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카게야마는 어쩐지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사실 야구장도, 영화관도, 미술관도 잘 모르겠어. 나는 그냥 네 웃는 얼굴을 마음껏 볼 수 있어서 너와 어딘가 놀러 가는 걸 좋아해."

 

   히나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카게야마는 얼굴을 구기고는 크게 숨을 골랐다. 어느새 목소리가 빨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 입술을 적신 카게야마가 시선을 맞춘다. 카게야마의 귓가가 슬쩍 달아올라있다. 히나타의 심장은 크게 두근거리고 있었다.

 

   "야구장에서 보고 일주일 만에 찾아온 거, 보고 싶어서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왜 안 믿어줘. 보고 싶었다고. 젠장. 참고 싶었는데…. 너랑 한번 키스하니까, 또 보고 싶어서 돌아버릴 것 같아서."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디지 못해서 만사 때려 치고 와버렸는데, 정작 히나타는 친구끼리면 안 된다, 만지지 마라하고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평상시 말수가 많지 않다는 걸 믿지 못할 만큼 카게야마는 엄청난 말을 몇 번이고 쏟아낸다. 히나타는 숨이 막혔다. 허리를 감싼 카게야마의 팔이 히나타를 조금 더 잡아당긴다.

 

   "어, 어?"

 

   히나타의 몸과 카게야마의 몸이 밀착한다. 이제 서로의 얼굴이 닿을 듯이 가까웠다. 히나타는 멍한 얼굴로 카게야마를 올려다보았다. 카게야마의 얼굴은 이제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이런데. 너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렇지만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춰온다. 히나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남자끼리인데?"

   "상관 없어."

   "남들이 손가락질할 텐데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카게야마는 더 강하게 허리를 끌어안아왔다.

 

   "그런 거 신경써야하냐?"

   "…과연, 카게야마 군은 그쪽인가요. 애초에 고민하는 선택지조차 없는 쪽인가요."

   "뭐야, 문제 있냐."

 

   카게야마가 미간을 찡그리며 되묻는다. 히나타는 웃음을 터뜨렸다.

 

   문제는 없다. 오히려 너무 통상의 카게야마 토비오라서 감탄했다. 정말이지…. 히나타는 눈을 감으며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카게야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누르듯 꾹 찍는다. 히나타의 말랑말랑한 입술이 닿아 카게야마의 몸이 굳어진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히나타가 입술을 떼어낸다. 히나타는 눈가와 코끝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환하게 웃어보였다.

 

   "네가 좋아. 너를 좋아해, 카게야마."

 

 

 

 

13.

   카게야마 토비오, 히나타 쇼요 부부의 결혼식에 초대합니다.

 

   희고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깔끔하게 박힌 글귀를 읽는다.

 

   사와무라 다이치는 어딘가 해탈한 것 같은 얼굴을 하며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에게 웃어보였다.

 

   "오랜만이다, 스가. 아사히."

   "오랜만, 다이치."

   "오랜만이야."

 

   모처럼의 모임이었다. 다들 반가운 기분으로 가득하다. 결혼식의 하객 석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저마다 인사를 나누기에 바빴다. 스가도, 아사히도, 다이치도 이 자리에 앉기까지 사람들과 인사를 한 차례 주고받았다. 이 부부와 꽤 친한 사이라고 스스로도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꽤 앞자리에 자리 잡았다.

 

   아사히가 입을 연다.

 

   "사이가 좋다고는 생각했지만 결혼을 하게 될 줄이야…. 전혀 상상도 못했어."

   다이치가 입을 열었다.

 

   "남자끼리 결혼을 할 수 있는 세계라면 결혼하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남자끼리 결혼할 수 있는 세계가 생각보다 빨랐지."

 

   스가가 입을 열었다.

 

   "거기에 남자도 임신할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도 생각보다 빨랐지."

 

   알파오메가 프로젝트라는 것이 있었다. 완성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신생기술로, 아직 부작용이나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성과로 한때 전 세계에 엄청난 이슈를 불러일으킨 그것이다. 하지만 최근 일본에 다시 그 프로젝트가 소란을 일으킨 이유는 단연, 그들의 후배들 덕분이었다.

 

   일본 최고의 프로 배구선수로 활동하다가 얼마 전 은퇴한 카게야마 토비오와 그와 같은 팀으로 뛴 적 있었던 히나타 쇼요가 임신을 이유로 결혼을 하겠다고 밝혀온 것이다. 알파오메가프로젝트는 약을 꾸준히 섭취하면 남자든 여자든 기존의 생식기관이 변화해 임신하거나 임신시킬 수 있는 체질로 바꿔주는 약이었다. '히트 사이클'과 '러트 사이클'이 밝혀진 가장 강력한 부작용이며 훗날 또 다른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모를 새로운 약이기 때문에 다들 꺼려하는 것인데 그들의 후배들은 과연 겁이 없었다.

 

   '히나타가 열심히 활동하다가 갑자기 먼저 은퇴한 거, 역시 그 부작용인가.'

 

   좀 더 현역으로 뛸 수 있었을 텐데 먼저 은퇴했다면, 아마 그거겠지.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라고 했으니까. 신나게 웃으면서 '남자오메가는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임신하는 게 안전하대요. 뭐 저는 원래 튼튼하지만!' 라고 말하던 히나타를 생각하면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다. 다이치는 그때를 떠올린다. 그렇게 좋아하는 배구를 조금이라도 더 하고 싶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웃고 말았다.

 

   "부럽네."

   다이치의 말에 스가와라와 아사히가 그를 돌아본다. 다이치가 씩 웃어보였다.

 

   "두 녀석, 정말 망설임 없이 살아가고 있지 않냐."

   "하긴. 그래. 굉장한 녀석들이야."

   "뭐, 확실히…. 히나타도, 카게야마도."

 

   각고의 노력 끝에 카게야마와 같은 프로 팀에 들어간 히나타는 카게야마와 함께 그 특유의 특별한 콤비네이션을 펼치며, 코트 위를 날아다녔다. 그 시기의 카게야마와 히나타는 실로 반짝이는 콤비였다. 후회 없을 만큼 멋지게 전설로 남을 법한 전성기를 보냈고 이제 두 사람은 두 사람의 새로운 미래로 함께 나아가려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두려움을 모르는 것처럼 저 멀리 뛰어갈 수 있는 것도 서로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리라. 인생이라는 먼 길을 걷는 동안 흔들림 없이 손을 잡아줄 사람을 두 사람은 찾아냈다.

 

   "카게야마 토비오, 히나타 쇼요의 입장을 큰 박수로 맞이해주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의 길을 축복하는 박수가 식장 가득 울려 퍼진다. 두 사람은 기쁜 얼굴을 하고 함께 발을 맞춰 걸었다. 가슴이 벅차도록 눈이 부신 광경이다.

 

   세계의 끝까지 함께 있자고.

   그 맹세를 하러 가는 길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