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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속 낭만

오이카와 토오루 X 히나타 쇼요

W.뽀뽀(@xo_kissing)​

   나는 커서 쇼쨩이랑 결혼할 거야. 어릴 적부터 이렇게 말한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실행으로 옮긴 사람은 몇 없었다. 솔직히 어릴 적에 지껄인 말을 현실로 옮기는 사람이 몇이나 있어. 그게 가능했다면 히나타는 벌써 우주비행사가 되어서 광활한 공간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을 테다. 내려다보는 지구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클 거고, 진공의 상태에서 닐 암스트롱의 마음가짐이나 상상해보면서 유유자적하겠지.

 

   “약혼식 하자.”

   “싫어요.”

 

   이딴 좆 같은 고민 따위 할 필요도 없을 테다. 우주비행사쯤 되면 돈도 많을 거고, 훈련받고 근무하느라 바빠서 결혼엔 학을 떼지 않을까. 저도 그렇고 아마 배우자가 될 사람도 그랬을 테다.

 

   “대체 왜 싫은데?”

 

   아무 것도 누르지 않는 무중력. 히나타는 우주를 생각한다.

 

   “어차피 결혼식도 할 건데, 두 번이나 머리 아플 필요 있어요?”

 

   왜 사서 고생이야. 결국 히나타는 범인이고, 그래서 온갖 복잡한 일들에 얽매이고 눌려 있다. 침대에서 눌리는 것도 억울한데 다른 것도 누른다.

 

   “크게 하지 말구 작게 하면 되잖아.”

   “작게 하는 김에 그냥 안 하면 안 돼요?”

   “난 하구 싶단 말야.”

 

   어릴 적부터 약혼식이랑 결혼식까지 야무지게 하는 게 꿈이었어. 오이카와는 영 불만이 많다. 이 인간은 히나타가 아는 인간들 중에서, 유년시절의 꿈을 가장 잘 이룬 사람이다. 가령 나는 쇼쨩이랑 결혼할 거라든지.

 

   “어떻게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살아요?”

   “한 번 사는 인생이니까.”

   “전 한 번 사는 인생 편하게 살구 싶은데요.”

 

   어쩌다가 얘랑 엮여서. 히나타는 자기가 준비 다 할 테니 너는 숨만 쉬라고 조르는 애인을 본다. 얘한테 낚인 게 하루 이틀인가. 좋아서 계속 만나긴 하는데 오이카와는 거짓말을 너무 잘한다. 잘생겨서 그런가 보다. 헛소리인 거 아는데 얼굴 보면 믿어주고 싶다.

 

   “나랑 살면 편할 걸?”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너무해.”

 

   진짜 안 해. 솔직히 히나타는 결혼식도 많이 부담스럽다. 일단 낯간지럽다. 결혼한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는 것도 부끄럽고, 이 인간은 식장 한가운데서 대뜸 입 맞출 수도 있는 인간이라서 걱정도 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오이카와 토오루. 오이카와는 제 머리색이 튀어서 끌렸다고 하는데, 솔직히 더 튀는 건 쟤다. 그래서 히나타는 엄청 튀고 싶다. 도망가고 싶어. 주부들이 가끔 다 놓고 떠나고 싶다고 하는데 그걸 지금 하고 싶어. 위기의 주부들.

 

   “너는 나랑 결혼하는데 그런 로망도 없어?”

 

   뭔 놈의 얼어 죽을 로망. 애초에 우리 둘이 결혼하는 것부터가 코메디다. 히나타는 유감스럽게도 오이카와랑 같은 골목에서 자라는 바람에, 쟤가 어떻게 커 왔는지 그 이면까지 낱낱이 알고 있다. 초등학교 때까진 곧잘 모범생처럼 굴더니 중학교 가서부터 사춘기가 거나하게 왔다. 귀 뚫고 머리 염색하고. 고등학교 때는 오토바이 타고 다니다가 걸려서 뒤지게 맞았다. 울고 불고 비는 소리가 골목에 쩌렁쩌렁 울렸는데, 오이카와는 아직도 그 얘기 꺼내면 자기 아니라고 빡빡 우긴다. 그거는 옆집 이와쨩이라나 뭐라나.

 

   “아니 뭐. 결혼은 현실이라는데 로망 품어야 하나요?”

   “진짜 낭만이 없다.”

   “인생도 현실이고.”

 

   누가 낭만을 따지면서 살아. 히나타는 아주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우주비행사의 꿈을 버릴 때부터 그랬다. 머리가 안 좋아서 바로 포기했다.

 

   “난 진짜 하고 싶은데.”

   “이번엔 안 통해요.”

 

   결혼식 하면 됐지 뭔 약혼식까지. 프로포즈야 진작에 받았으니 미련이 없다. 직장 잡고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싶더니, 대뜸 3개월 치 월급 모아서 약혼 반지 사 왔다. 결혼 반지는 어쩌게요? 물어보니까 적금 깬단다. 저렇게 철이 없는데 이 인간이랑 살아도 될까? 많이 벌지는 않지만 먹고 살 만큼은 버는 히나타는 좀 걱정이 된다. 집도 사야 하고 노후 대비도 해야 하잖아? 근데 약혼식을 하자구?

 

   “진짜 안 할 거야?”

 

   심통난 얼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저런다. 정말 철이 없다. 잘생긴 게 장점인데 잘생긴 게 단점이다. 쇼쨩은 나 어디가 좋아? 하면 얼굴이라고 대답할 거고, 어디가 싫어? 하면 얼굴이라고 대답할 거다. 너무 잘생겨서 인생이 영화인 것만 같은 얘. 그래서 로망이니 낭만이니 따지나 보다. 영화 주인공까진 좀 무리인 히나타에겐 남의 나라 얘기 같은 것들.

 

   “안 한다니까요?”

   “그럼 나 너랑 결혼 안 할래.”

 

   정말이지 애다. 나이 어디로 먹은 거지? 2년 더 살면 나보단 어른스러워야하는 거 아냐? 드디어 히나타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뒀다. 결혼이 장난도 아니구.

 

   “좋아요.”

   “한다구?”

   “아니요.”

 

   저도 결혼 안 한다구요.

 

   단호한 음성이었다. 잘못 들었나 했던 오이카와는 입을 떡 벌렸다. 이게 아닌데?

 

   “응?”

   “이것도 가지고 가세요.”

 

   전당포에 팔든지 말든지. 히나타는 현실적인 인간이지만, 남의 현실 가볍게 얘기하는 사람은 딱 질색이다. 걸 게 따로 있지 감히 결혼을 걸어? 너무나도 괘씸하다. 그래서 히나타는 많이 당황한 것 같은 오이카와를 앞에 두고 과감하게 약혼 반지를 뺐다. 오이카와가 끼워주고 나서 사흘 정도는 헤벌레 웃게 만들었던 바로 그 반지.

 

   “어, 잠깐만, 잠깐만 쇼쨩.”

 

   잠깐은 내가 줬던 기회가 잠깐이구. 히나타는 혈혈단신으로다가, 아주 과감하게 자리를 떴다. 네 맘대로 할 거면 너 혼자 살아.

 

 

 

 

 

   우주 기준으로 보면 인간은 먼지보다도 작다고 했다. 그래서 그 먼지 중 하나 카페에 놓고 나와도 큰일이 생기진 않았다. 대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먼지의 연락이 부리나케 쌓였다. 대개 연락 좀 받으라는 내용이었는데 읽고 씹었다. 또 지 맘대로야 또.

 

   “너 토오루하고 싸웠니?”

   “아뇨.”

 

   헤어졌는데요. 히나타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밥 한 젓가락을 떠 넣는다. 대신 다른 인간들이 많이 충격을 받았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아버지가 침착하게 묻는데 귀찮아서 헤어졌다구 했다.

 

   “사람 만나는 게 장난도 아니구 귀찮다고 헤어져?”

   “그러니까요. 그쪽에서 장난치길래 헤어졌어요.”

 

   장난기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요. 자세한 건 묻지 말아주세요. 우물우물. 사생활 보호 벽을 치는 아들은 가끔 속을 모르겠다. 얼굴은 가끔 고등학생으로 오해 받을 정도로 어린데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누구랑은 다르게 나이를 헛먹진 않았단 소리다.

 

   “오이카와 상도 아시고?”

 

   이 오이카와 상은 토오루가 아니라 그 아부지다. 히나타네 아부지와 가끔 사케를 기울이는 그 분. 좋은 친구에서 좋은 사돈되게 생겼다고 껄껄 웃던 분들인데 그걸 깨부순 건 좀 죄송하다. 근데 어떡해. 우리가 좋은 부부가 못 될 것 같은데. 좀 못돼처먹은 것 같긴 하지만 원래 인생은 혼자 사는 거다.

 

   “아시겠죠 곧.”

 

   사실 그쪽이 아직 이별을 받아들이지는 못 한 것 같아서. 또 우물우물.

 

   “너희 식장 날짜도 잡지 않았니?”

   “취소하면 되죠, 위약금은 그러라고 있는 거고.”

 

   위약금 따위 물면 되는 것도 모르고 결혼 하니 마니 그런 소리 쉽게 하지. 역시 잘못은 그쪽이 했다. 히나타는 한 그릇을 지 혼자 가뿐하게 비웠다. 충격받은 부모님은 연신 뭔가를 속닥대고, 나츠는 괜히 눈치를 본다. 오빠 설마 내가 옛날에 토오루 좋아해서 그래? 하는 이상한 소리까지 하길래 퍽 웃음이 터졌다. 그러니까 다들 미친놈처럼 본다. 실연의 상처가 심했구나, 하는 여섯 개의 눈동자.

 

   “좋게 헤어졌어요.”

 

   아마두. 조건으로 붙는 말에 확신이 없긴 했으나 일단은 그렇다.

 

 

 

 

 

   “너 미쳤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오이카와가 왔다. 슈퍼 가려구 대충 슬리퍼 끌고 나왔는데 대문에서 마주쳤다. 그래도 예의 차린다구 마구잡이로 침입하진 않았다.

 

   “제가 왜요?”

   “그렇게 가 버리는 게 어딨어?”

 

   어딨긴 여기 있지. 더 이상 여기 있기 싫어서 히나타는 빨리 걸음을 뗀다. 종종걸음이었는데 오이카와가 몇 발만에 바로 따라잡았다. 어째 타고난 신체 조건이 좀 억울해지고.

 

   “얘기 좀 하자.”

   “아까 충분히 했는데요.”

   “난 아냐.”

   “저도 아닌데요.”

 

   지가 먼저 결혼 안 한대서 맞장구 쳐주니까 왜 이래. 히나타는 코웃음을 치면서 갈 길 간다. 간장 사야지.

 

   “야, 내가 이 간장보다 못한 사람이야?”

 

   슈퍼까지 졸졸 따라붙은 오이카와는 어째 지가 더 상처받은 얼굴이다. 간장 가리키는 손가락엔 히나타에게 없는 반지가 여전히 끼워져 있다. 안 한다며? 정말 언행불일치다.

 

   “물도 사야 하는데…….”

 

   혼자 중얼거리니까 되게 자연스럽게 물 두 병 꺼내든다. 양 옆구리에 끼고서 계속 뭐라구 한다. 쇼쨩, 나랑 얘기 좀 하자니까? 좋은 짐꾼 같아서 일단은 내버려뒀다. 계산을 마치고서도 포기를 몰랐다. 이래서 지가 하고 싶은 모든 목표는 다 이루나봐. 히나타는 거기에 먹칠 하나 하고 싶어졌다. 제 몸뚱아리가 협조 안 해주면 깨부술 수 있는 게 두 개나 된다. 약혼식 결혼식. 어쩌면 오이카와는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싶어할 수도 있으니까 장례식까지 쳐서 세 개로 정정.

 

   “내가 말 함부로 한 거 미안해.”

   “알면서 왜 하는 거예요?”

 

   이해할 수가 없어. 내가 거기에 눈 꿈쩍이라도 할 것 같았나. 애정의 크기를 재단할 순 없지만 비교할 순 있다. 상대성으로 보자면 오이카와는 늘 히나타에게 진다. 더 많이 좋아해서 진다.

 

   “…….”

   “모르죠?”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말에는 무게가 있고 그래서 져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잘만 꼬신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아이구 꼬시다.

 

   “…….”

   “애처럼 굴지 말구 집에 가요.”

 

   아, 물은 고맙고. 집 앞에 도착한 히나타는 매몰차게 물을 뺏어든다. 오이카와는 나라 잃은 얼굴로다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게 나는 왜 말을 막 하지. 얼굴엔 이 고민이 써 있다. 막말은 쉬운데 이유는 어렵다. 어려운 건 고민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해 본 게 괘씸하다. 그것도 결혼을 앞두고서.

 

 

 

 

 

   현실과 낭만은 늘 충돌한다. 다르다는 건 곧 마찰을 의미한다. 오이카와는 속상했다. 계속 떼쓰면 들어줄 줄 알고 헛소리 지껄인 제 주둥이도 한 대 쳐버리고 싶고, 매몰차게 안녕을 고하는 그 입엔 입 맞추고 싶다. 좀 미운데 그렇다. 오이카와는 그 정도로 히나타를 좋아한다. 사실 제가 만난 대부분의 연인들은 대개 을의 위치에 있었다. 오이카와를 더 좋아한 탓이다. 그래서 썅놈 짓도 몇 번 하고 개새끼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이번엔 지가 을이다.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살면 안 돼. 권선징악이 단순 옛말이 아니란 말야.

 

   히나타가 미운 이유를 꼽으라면 숱하게 댈 수 있다. 너무 냉정한 점, 현실적인 점, 제 로망이랑은 딴판인 삶을 살고 있다는 점. 그 외 등등. 근데 좋은 이유는 뚜렷하게 못 대겠다. 누군가가 ‘그냥’으로 답할 수 있는 게 사랑이라구 했다. 히나타가 오이카와한텐 그냥인 사람이다. 그냥 그럭저럭이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의 그냥. 안 맞는 게 많다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그냥 계속 같이 있고 싶은 사람. 그게 오이카와한테는 낭만이자 로맨스다.

 

   근데 히나타는 이제 이유를 요구한다. 왜 그랬냐니? 나도 모르겠다. 히나타랑은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떨려서 그 앞에 서면 정상적으로 머리가 안 돌아간다. 머리보다 입이 빠르다. 지금까진 히나타가 거기에 잘 맞춰준 편이어서 계속 그따위로 굴었나 보다. 사기까진 3개월도 넘게 걸리고, 끼워주기까진 1주일 고민한 반지를 히나타는 5초 안으로 뺐다. 오이카와는 제 새끼에 대신 끼워둔 반지를 만지작거린다. 히나타 손에 있을 땐 그렇게 잘 어울렸는데 이렇게 초라할 수는 없다. 평생을 잘생겼단 소리만 듣고 살았는데 결국은 불쌍하게 됐다.

 

   그래서 포기했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다. 쟤한테는 나랑 만난 3년이 그렇게 쉬운가? 이것도 좀 섭섭했다. 하긴 그 3년 먼저 깨부순 건 제 쪽이긴 한데.

 

   아무튼 말도 안 된다. 약혼식이랑 히나타 중에 고르라면 당근 히나타다. 히나타는 당근 대신에 채찍을 줬지만, 가끔 이와쨩에게 말 닮았단 소리 듣는 오이카와는 그 어느 쪽이든 받아들일 속셈이다. 쇼쨩이 하면 다 좋아. 헤어지잔 말 말고는 다 좋아.

 

   “진짜 잘못했어.”

 

   잘잘못 따지자면 과오는 저한테 있으니 저자세를 취하기로 했다. 백수도 아닌 주제에, 퇴근하면 골목 살피다가 히나타 머리털 하나라도 보이면 튀어나가서 싹싹 빌었다. 가끔 실수로 나츠한테 빈 적도 있다. 대체 뭘 잘못했길래 그래? 바람피웠어? 나츠가 물어봐서 핏대 세우며 부정했다. 내가 나쁜 놈이긴 한데 부정 탄 놈은 아냐. 그러니까 잠수 탄 네 오빠 좀 불러다 주라.

 

   “헛짓거리 그만 하세요.”

   “이게 왜 헛짓거리야?”

 

   나한텐 의미 있는데. 무릎 꿇을 기세인 오이카와는 오늘도 쩔쩔맨다. 정작 만나면 손끝 하나 건들진 못한다. 괜히 만졌다가 엄청 싫어할까봐서다. 사실 매달리는 것도 싫어한다는 거 아는데, 이건 포기 못하겠다. 고집인 거 안다. 알아도 어쩔 수 없다.

 

   “왜 그랬는지는 생각해 봤어요?”

   “아니.”

 

   그건 진짜 모르겠어. 그래서 말해줄 순 없는데 내 잘못은 맞아. 반은 맘에 들고 반은 맘에 안 드는 반성이었다. 지가 해 놓고 왜 몰라? 는 히나타의 입장이고, 자기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는 게 오이카와의 입장이다.

 

   “내가 뚫린 입이라고 막 지껄여서 미안해.”

   “입은 계속 뚫려 있을 거 아녜요?”

   “대신 귓구멍도 뚫려 있잖아.”

 

   하지 말라면 바로 닥칠게. 그거론 안 될까? 비굴하게 굴었다. 사람이 입은 하나고 귀 두개인 이유가 그거라구 그랬어. 말하는 시간 두 배로 들으라구.

 

   “가세요.”

   “나 내일도 기다릴게.”

 

   진짜야. 진짜 기다린다. 한다면 한다. 안 시켜서 그렇지 시킨다면 땅에 머리 박고 석고대죄할 수도 있다. 오이카와는 차갑게 닫히는 대문 앞에서 코를 쓱 닦았다. 어우 추워.

 

 

 

 

   다음날은 꽃샘추위인지 더 쌀쌀했다. 출근하면서 제 슬픈 운명을 직감했다. 오늘은 졸라게 춥겠군. 몇 분 기다리면 올까. 재수 없으면 몇 시간일 수도 있었다. 히나타의 직장은 들쑥날쑥 야근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 쇼쨩이 야근하는데 나도 야근할 수 있지 뭐. 그래서 오이카와는 퇴근하자마자 가방 집에 던지구 남의 집 앞에 야근하려구 섰다. 뭐 하나 걸치고 나올걸. 그치만 원래대로라면 히나타도 퇴근할 시간이었으므로, 오이카와는 그냥 옷을 포기했다.

 

   불쌍하다는 얼굴 한 나츠가 들어가고, 고생이 많다고 어깨까지 두드린 히나타의 부모님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기다리던 사람이 나타났다. 히나타의 걸음은 빠른 듯하면서도 느리다. 열심히는 걷는데 막상 발 맞춰보면 적당한 속도다. 거기에 맞추는 걸 좋아했다. 오이카와는 히나타랑 맞추는 건 다 좋아한다. 그게 입이든 발이든 몸이든.

 

   그래서 골목 저만치서 나타난 인영이 가까워지기까지는 좀 걸렸고, 이상하게 쓱 지나치는 건 빨랐다. 진짜 추워서 덜덜 떨고 있던 오이카와는 최초로 비참했다. 날씨가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도 있군. 사실 이렇게 만든 건 히나타지만 탓하진 않는다. 쇼쨩은 아무 것도 잘못한 거 없어. 누가 그랬냐면 내가 그래.

 

   “안녕히 가세요.”

 

   오늘은 작별 인사도 해줬다. 내용이 좀 슬프지만 먼저 말 걸어준 거에 의의를 둔다. 알았어, 미안해. 하구 가려는데 갑자기 툭, 툭, 물이 얼굴에 떨어진다. 우는 건 아니구 빗방울이었다. 봄을 알리는 봄비. 오이카와는 작년부터 봄을 기다렸다. 5월에 결혼하기로 해서다.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오고 지랄일까. 그게 갑자기 사람 센치하게 만들어서 이번엔 진짜 눈물이 터졌다.

 

   느닷없이 코를 훌쩍거리니까, 막 현관문 열려고 하던 히나타가 돌아섰다. 걸리면 쪽팔리므로 비염인 척 하려고 코를 닦았다. 근데 눈물은 코가 아니라 눈에서 나온다. 꽃가루 알레르기는 눈물 나나? 비 오는데 꽃가루 날리나?

 

   “안녕 못 해요?”

   “아냐, 잘 할 수 있어. 잘 들어가.”

 

   안녕. 이별 고하는 건 아니구 오늘의 작별 인사야. 빨리 들어가라구 손짓하면서 꼿꼿하게 목을 세웠다. 그러면 덜 울컥하지 않을까 싶어서다. 효과는 그닥. 히나타가 그냥 현관문 닫고 들어가버렸으므로 아주 최악.

 

   어쩜 저리도 차가울까. 정말 정이 다 떨어졌나. 비도 떨어지는데 정도 떨어질 필요 있을까. 오이카와는 의심되는데 히나타는 아닌가 보다. 으슬으슬 몸도 떨리는데 너무 속상하구 서러워서, 오이카와는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남의 집 앞에서 울어요, 왜?”

 

   다시 문이 열렸다. 장우산을 든 채였다.

 

   “우산 안 줘두 돼. 나 집에 갈 거야.”

   “나 쓰려구 갖고 나온 건데.”

   “…….”

 

   끝까지 매정하시다. 어째 민망하기까지 해서, 오이카와는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어차피 비 내리니까 구분 안 되지 않을까. 그런 것 치곤 눈가나 코끝이 지나치게 발갛긴 하지만.

 

   “어디 갈 건데?”

 

   나 여기 세워 놓구 갈 곳이 어딘데? 이번엔 애처럼 엉엉 울었다. 히나타가 애처럼 굴지 말라구 했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게 타고난 걸 어쩌란 말이야. 슬픈 걸 어떡하라구 나더러.

 

   “…….”

   “알았어, 안 물어볼게. 근데 이거만 듣고 가.”

   “…….”

   “미안해.”

 

   결국엔 무너진다. 호흡은 엉망이다. 얼굴 보여주기 싫어서 양손에 묻고서 운다. 나 다 고칠게. 진짜루. 뭐 잘못한 건지 아는데 기회도 못 주니. 내가 너랑 3년 만났는데 하루로 끝낼 수 있니. 너 정말 너무한 거 아냐. 생각나는 대로 미움을, 애정을 쏟아냈다. 이판사판이다.

 

   “언제는 그렇게 울던 거 자기 아니라더니.”

 

   목청 들으니까 그때도 토오루가 운 거 맞구만 괜히 애먼 사람 잡구 있어. 어느 정도는 웃음기를 띤 목소리였다. 갑자기 뭔 말이야? 오이카와는 흐린 시야를 소매로 닦는다.

 

   “잘만 우네.”

 

   왜 인정을 못 해요? 토오루는 그것도 문제야. 이번엔 빙글빙글 웃는 얼굴이다. 아주 서러워 죽겠다. 왜 웃어? 내가 웃겨? 내가 이렇게 진지한데 웃겨?

 

   “그럼 화낼까요?”

   “그건 아니.”

   “웃으면 좋은 거지.”

 

   웃으면 복이 온다구 그러던데. 물론 믿진 않는데 토오루는 믿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대문까지 걸어 나온 히나타가 우산을 기울였다. 말이 기울인 거지 팔 잔뜩 펴고 까치발까지 서서 가능한 자세였다. 자연스레 우산대를 건네받았다. 툭툭, 빗방울이 얇은 천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결혼 앞둔 사람이 감기 걸려도 돼요?”

   “되겠냐. 따뜻하게 입고 다녀 너.”

   “근데 왜 그러고 있어요.”

   “너 좋아서.”

 

   당연한 걸 묻고 그래. 넌 왜 맨날 물어봐? 다 너 좋아서 그러지. 그러니까 내가 이러구 있지. 씩씩한 척 하려구 하는데 여전히 먹먹하다. 진짜 좋아해.

 

   “영화에서나 하는 짓인데 이거.”

 

   막 비 오는데 기다리구 하는 거. 영화 많이 봤구나.

 

   “그게 중요해?”

 

   이번엔 오이카와가 물었다.

 

   “글쎄요.”

 

   인생 살아가면서 영화 볼 수도 있죠. 느릿느릿하게 대답했다. 그 대신에 옷자락을 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약혼식 거나하겐 안 할 건데, 지금 하게는 봐 줄게요.

 

   그래서 오이카와는 두 번째로 히나타에게 반지를 끼웠다. 훌쩍거리면서. 나랑 결혼하자. 나랑 결혼해주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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