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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게

코즈메 켄마 X 히나타 쇼요

W.애랑(@Aerangheart)​

-엠프렉 요소

   녹진한 공기를 이기지 못한 흔적이라도 되는 냥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꽁지만 보이도록 묶었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지는 여름이다. 책상에 쌓인 업무를 피하기 위해 옥상에 올라 담뱃불을 붙이자니 이열치열도 정도가 심하다. 코즈메 팀장님 이제 농땡이도 못 부리겠네요. 서글서글 웃는 입사 동기 쿠로오에게 날 선 눈빛을 보내자 킥킥 웃음소리가 돌아온다.

 

   “야근이나 하는 주제에.”

   “뭐?”

   “아니야, 아무것도.”

 

   제 처지에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쿠로오가 햇빛을 등지고 옥상 난간에 기대었다. 그러는 사이 코즈메는 왼손으로 휴대폰을 들어 올렸고 이내 심각한 표정이 되어 한숨을 쉰다. 삐걱 대는 문소리와 함께 등장한 리에프는 아- 역시 선배님들 다 여기 계셨네요! 인사했지만 선배라고 불리는 개중 누구도 반겨주지 않았으니, 겸연쩍을 법도 한데 얼굴만 봐서는 헤벌쭉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무도 묻지 않은 상사 얘기를 하며 신세한탄을 하고 있지를 않나…. 그래도 듣는 시늉이라도 해주는 쿠로오와 달리 코즈메는 영 다른 곳에 시선이 가 있다.

 

   “먼저 들어갈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리에프는 무슨 일이냐며 묻지만 쿠로오는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것이 있어 설마- 하며 넘겼지만 생각보다 그 예측은 꽤 잘 맞아 떨어졌다. 코즈메 켄마, 반려자 히나타 쇼요와 뜨거운 여름이 시작된 이래 벌써 다섯 번째 냉전 중이었다.

 

   부부 사이에 한두 번 돌아오는 냉전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던가.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코즈메는 처음 그렇게 말한 작자를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눕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연애기간 3년, 부부로 함께 생활한지 이제 1년. 아직 코즈메 쇼요가 되려면 마음의 준비가 더 필요하다던 히나타의 의사를 존중해 아직 호적에는 등록하지 않았다. 아무렴, 연애기간 중에도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해 한 번도 히나타의 심기를 거스른 적이 없던 터라 사소한 사랑싸움도 물 흐르듯 흘려보냈더니 최근 들어서는 고비의 연속이다. 빈 말로라도 코즈메와 히나타는 성향 면에서 닮은 구석이 없다. 그렇지만 원래 저와 반대의 사람이 끌리는 법이라고, 첫 만남부터 죽이 척척 맞아 종래에는 눈까지 맞아버렸다. 잠깐, 켄마상 저는 싫어하셨잖아요!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리에프가 외쳤건만 코즈메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답했다. 넌 쇼요가 아니잖아. 그러게 본전도 못 찾을 말을 왜 해서는- 쯧쯧 소리를 듣는 것은 온통 리에프 몫이다.

 

   부부의 연을 맺고도 몇 달 동안은 괜찮았다. 코즈메의 신경은 온통 히나타에 집중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히나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해 행동은 이전보다 훨씬 조심스러워 졌으며 집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덕분에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루던 결혼 생활이었다. 기실 코즈메에게 있어 히나타만 반려자로 남아준다면 그것만으로 행복이겠지만. 조화롭던 균형은 뜨거운 여름의 시작과 함께 붕괴됐다. 처음 한 번을 겪었을 때, 이런 식으로 더위를 이겨내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심각한 이유는 아니었다. 요컨대 여태 있었던 일화 모두 사소한 것에서 기인했다는 점이 코즈메를 미치게 했다.

 

   “첫 번째가 그거지? 다리미질.”

   “응.”

 

   나 잠깐 쇼요한테 문자 좀…. 기어코 퇴근 시간에 코즈메를 끌고 나온 쿠로오와 리에프는 흥미롭다는 눈으로 코즈메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쿠로오 선배는 오늘 야근 아니었나요?! 어, 그거 대충 내일로 미루면 돼.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술병이요, 비어 있는 것은 그들의 잔 이니 쿠로오의 상사가 들었으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일이다.

 

   “아! 다리미질 하다가 화 낸 거죠? 하기 싫다고?”

   “아니. 그 반대야.”

   “반대요…?”

 

   괜히 말할수록 히나타 욕 먹이는 기분이라 잔뜩 고민하던 코즈메가 제 입으로 술을 털어 넣었다. 어이구, 오늘따라 오버페이스네. 쿠로오는 여태 본 적 없는 오랜 친구의 새로운 모습이 신기했다. 히나타와 함께 살기 전에 홀로 자취 생활을 했던 코즈메는 가사 일에 능한 편이었다. 결혼 전부터 몇 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의 복장 규제는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기본적으로 상의는 셔츠를 고수했다. 번거롭긴 하지만 출근하기 전 까지는 꼭 셔츠에 다리미질을 하는 것은 코즈메에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그래서 결혼생활 내내 다리미질은 코즈메의 몫이었는데 대뜸 히나타가 제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더랬지.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다리미 전원도 끄지 않고 히나타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몇 시간 동안, 잠에 들 때 까지 답도 안 해주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한다는 말이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다.

 

   “못 미더워서 안 맡기는 거냐고 서러워했어. 쇼요가 일 하는 게 싫어서 내가 하는 건데.”

 

   잔과 잔 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린다. 그 날 퇴근하던 길에 코즈메는 꽃 한 송이를 샀다. 쿠로오의 권유였다. 처음 겪는 상황이 어지간히 감당하기 힘들었던지 안절부절 못하는 코즈메의 표정을 지켜보는 재미는 쏠쏠했다는 후문. 물 한 방울 안 묻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애지중지 히나타를 아껴주려던 코즈메의 마음을 그 누가 모를까. 그리고 이것이 시초였다.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히나타는 울거나, 화를 내거나, 짜증 아닌 짜증을 부렸다. 그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도저히 평범한 이유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였다.

 

   “오늘은 뭐였는데?”

   “쇼요가 아침을 잘 먹길래…정말 잘 먹어서 예쁘다고 했는데 화냈어.”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도 쇼요가 먹는 모습은 마냥 예쁘게만 보였는걸. 출근 시간과 맞물려 길게 얘기하지는 못했지만 히나타는 분명 자기가 많이 먹는 걸 보고 눈치를 준다며 코즈메를 닦달했다. 코즈메가 더 변명할 여지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얼른 나가라고 하는 통에 챙겨야 할 서류도 하나 두고 온 해프닝이 있던 오늘이다. 코즈메가 원체 소식(小食)가인 것을 모르는 지인은 없다. 그것은 히나타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히나타는 작은 체구에 비해 먹는 양이 많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 차이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함께 한 시간이 긴 만큼 서로의 식사 패턴에 대한 이해 시간은 충분히 가졌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 되지는 않았다. 코즈메는 저가 깨작깨작 먹을 때에도 신경 쓰지 않고 잘 먹는 히나타가 좋았다. 연애 할 때도 그런 것을 들어 예쁘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그 덕에 입버릇처럼 식사할 때마다 나오는 말인데 오늘따라 왜 그렇게 민감했는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저기-”

 

   넘실대는 술을 마시려던 찰나 짐짓 심각한 얼굴이었던 리에프가 입을 열었다. 별 거 아니겠지 하고 술잔을 기울이는 두 사람 사이로 전혀 예상치 못한 단어가 들린다.

 

   “두 사람 요즘도 피임 하나요? 콘돔을 쓴다던가-”

 

   코즈메의 눈은 리에프를 향해 쓰레기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네놈이 한다는 말에 조금의 기대라도 걸었던 내가 바보지. 겨우 오냐오냐 해주던 쿠로오도 이번만큼은 회생 불가능라고 생각했는지 손을 젓는다. 리에프는 어떻게든 해명해야 할 기회를 잡기 위해 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임신! 임신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여! 저희 누나가 결혼을 엄청 일찍 해서, 임신 초기 때에 매형이 엄청 고생했다고 얘기해줬는데 쇼요도 그거랑 비슷한 것 같고!”

   “쇼요라고 부르지 마.”

 

   그 와중에 그게 중요하냐고, 그럼 이제 켄마 상이랑 결혼까지 한 마당에 뭐라고 부르냐고 궁시렁대는 리에프를 뒤로 하고 벌떡 일어선 코즈메가 천천히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는 술집 안은 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했다. 고성방가가 난무하는 주변 소음들이 점점 멀어진다. 별 다른 인사말이 없었지만 아마 코즈메가 향하는 곳은 히나타가 있을 집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쿠로오는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리에프에게 일러주었다. 임신이 아니면 뒷감당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리에프는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최근 들어 얼굴도 본 적 없는 히나타가 꼭 임신이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술잔을 넘겼다.

 

   코즈메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틀에 고정 되어 있던 상황에 거대한 변수가 나타나 균열이 생긴 거라면 저가 이해하지 못했던 히나타의 행동에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을 성 싶었다. 집 앞에 서서 들어가기 전에 옷깃을 정리하고, 몸에 밴 냄새를 털어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밤이 되었지만 여전히 눅눅한 공기가 주변을 에워싸는 여름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묶은 머리 뒤로 흐르는 땀이 더워서 흐르는 땀인지 식은땀인지도 모를 일이다.

 

   “쇼요.”

 

   저녁 식사 자리가 있어 늦는다고 일렀던 연락에는 답장이 없었다. 불 꺼진 집 안에 발을 들이고 조용히 그 이름을 불러보았다. 혹여 저가 너무 미워 집 밖에 나간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침실 문을 열어젖히자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들썩이는 인영이 눈을 비비는 시늉을 한다.

 

   “켄…마?”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본 코즈메가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겨준다. 히나타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인상을 찌푸리고 이리저리 둘러보기에 바빴다. 이윽고 놀란 체를 하는 감탄사까지. 분명 저는 햇살이 나른한 오후에 에어컨을 틀고 잠시 눈만 붙였는데 주변이 온통 깜깜해졌기 때문이다. 코즈메는 아귀에 들어맞는 상황을 정리하며 짧게 입을 맞췄다.

 

   “아침엔 내가 잘못 했어.”

   “켄마, 있지 그게…나도 모르게 그냥 화가 나서 그런 거야.”

 

   요즘 기분도 오락가락 하고, 갑자기 별 거 아닌 거에도 화가 나고, 그래서 막 화내고 난 다음에 정신 차리고 보면 켄마한테 엄청 이상한 말만 한 것 같아서-

 

   “쇼요.”

   “응?”

   “줄 게 있어.”

 

   또 꽃을 사왔나. 언젠가부터 저와 다툼이 있을 때 마다 꽃을 사오는 코즈메의 행동이 아주 귀여워 보이던 참이다. 사올 때 마다 꽃의 종류도 다 달라서 관상용으로 두고 제법 추억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번엔 또 어떤 꽃일까 기대하던 히나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작고 긴 상자였다.

 

   “꽃이 아니네?”

   “응.”

 

   영어로 큼직하게 적힌 글자 중 눈에 띠는 ‘TEST’, 그리고 부연 설명을 돕기 위해 적힌 히라가나를 천천히 읽어가던 히나타의 동공이 점점 커졌다. 삐걱대는 근육을 느끼며 바라본 코즈메의 눈에 장난기라고는 없다. 원체 장난스러운 사람이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성()생활은 부부관계에 있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실상 속궁합이야 진즉에 확인해본 이력이 있다만, 히나타는 체내에 남는 이물감이 싫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체외사정 과정을 거치고 싶지 않아 결혼 후에도 늘 콘돔을 요구했다. 피임의 목적보다는 기호의 차이에서 기인했지만 결론적으로 피임과 직결되는 행위였다. 그래서 더욱 눈앞에 놓인 임신 테스트기를 부정했다. 하하, 켄마. 우리 그래도 매일 콘돔도 썼고-

 

   “아니야.”

   "뭐가 아니야?”

   “매일 아니잖아.”

   “그럴 리가 없는…데.”

   때마침 히나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과 함께 우수에 찬 코즈메의 눈이 번뜩인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이상 무력한 눈동자는 종종 이렇게 생동감 넘치게 변하곤 했다. 그리고 히나타가 느끼기에 이 경우는 대부분 색욕으로 연결되었다. 쇼요, 쇼요, 정말 기억 안 나?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이 우위에 있다. 어느덧 코즈메가 히나타 위에 올라타는 자세가 되어-

 

   “자, 잠깐만! 잠깐!”

 

   조금 더 상황을 이해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야기는 봄의 끝자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 늦은 봄비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 날 코즈메는 아침부터 히나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출근하기 싫다고 투덜댔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하루 종일 집 안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던 히나타에게 유독 아침의 잔상이 길게 남았다. 그리고 베란다 창을 열자 툭 떨어지는 빈 담배 곽을 보며 코즈메의 등을 떠올렸다. 코즈메가 각별한 애연가라는 것을 연애 중에는 알지 못했다. 켄마, 내 앞에서 한 번도 핀 적 없잖아. 그거야 쇼요니까. 특별히 다정한 구석을 몸소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사소함에서부터 애정이 느껴지는 사람이 코즈메 켄마다.

 

   [켄마! 먹고 싶은 거 없어?]

 

   원체 식탐도 없고 식욕도 없는 배우자임을 알지만 혹시나 힘이 될까 하는 마음에 짧게 문자를 남겼다. 적성에 맞게 게임 디렉터로 일 하고 있는 코즈메는 다가올 바캉스 시즌을 위한 마케팅 업무 팀과의 협업이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아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불규칙한 야근은 끝이 없었고, 그 때문에 히나타를 자주 볼 수 없다는 요인이 코즈메에게 큰 스트레스였다.

 

   [쇼요.]

   먹고 싶은걸 물어 봤는데 왜 이름을 불러대나 하는 의문은 붉어진 얼굴과 함께 해소됐다. 말은 이렇게 해도 막상 집으로 돌아오면 피로 때문에 묶은 머리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잠들기 일쑤다. 히나타는 다시 한 번 연락을 보냈다. 오늘 일찍 와? 그랬더니 한 시간 내에 긍정의 답장이 왔다. 코즈메에게 뭘 해주면 좋을까- 일단 저녁시간 전 까지 고민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정 떠오르는 것이 없으면 애플파이라도 만들어볼 요량이었다.

 

   ‘나 왔어.’

 

   그리고 코즈메의 이른 등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일찍 오냐고 묻긴 했다만 그건 그냥 정시 퇴근이냐고 물은 건데…. 오후 세 시는 지나치게 이른 시간임이 틀림없었다. 짧은 순간 다양한 가설을 세워 상황을 정리하던 히나타는 이래저래 생각이 한 가지 방향으로 밖에 트이지 않았다. 사직서를 냈구나. 코즈메 성격에 이런 회사는 도저히 귀찮아서 못 다니겠다고 사직서 내고 온 거 아닌가 걱정스러워 노심초사하는 히나타를 달랜 것은 말없이 이어진 키스였다. 달랬다기보다는, 입막음에 가까운 그런 행위. 켄마, 다 좋은데 나 상황 설명 좀 해주라.

 

   ‘일이 끝났어.’

   ‘정말?’

   ‘응. 남은 일은 쿠로가 다 처리할 거니까.’

   알다마다. 쿠로오 테츠로는 당시까지만 해도 코즈메 팀 내 부서에 소속되어 있었다. 아 그렇구나- 사직이 아니라는 점은 기뻤으나 얇은 천 사이로 들어오는 손은 속수무책이다. 켄, 켄마! 저기요 코즈메 씨? 한참 그렇게 발버둥을 쳤지만 돌아온 것은 훤히 드러난 맨 살이다. 꼭 억울하게 나는 벗겨놓고 켄마는 멀쩡하게 다 입고 있고. 툴툴대던 히나타를 꼭 끌어안은 켄마가 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당장 안고 싶어.’

   ‘으응…지금도 안겨 있는 것 같은데-’

   ‘이거 말고.’

   비록 눈치 없는 것으로는 남들과 견주었을 때 하등 부족하지 않은 히나타지만 코즈메의 말 뜻이 무엇인지쯤은 어렵게 머리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 뒤로 물러섰지만 맞닿는 것은 쇼파 팔걸이였으니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날이 더워졌다고 했나. 코즈메는 여름이 다가올 때가 되면 이따금 꽁지 정도의 길이로 머리를 묶었다. 본디 회사 밖에서는 잘 하지 않던 행동이었다만 어느덧 습관이 되었는지 히나타 앞에서도 자주 모습을 보였다. 그거 귀여워 켄마. 자주 모습을 보였던 이유로는 히나타의 반응이 좋았던 것도 한 몫 했다. 그런 꽁지머리가 섹스어필의 기능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낮 치고는 흐리지만 밤 보다는 밝은 낮 시간이라 히나타는 얼굴을 꼭 가렸다.

   ‘아….’

   ‘왜?’

 

   한 쪽 손으로는 셔츠 단추를 풀고 한 쪽 손으로는 쇼파 옆 수납장 어딘가 쯤을 살피던 코즈메의 행동이 멈췄다. 눈앞에 있던 손을 내린 히나타는 잔뜩 찡그린 얼굴의 코즈메를 볼 수 있었다. 한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박스는 사용 설명서가 부스럭대는 소리로 비어있는 티를 냈다. 잔뜩 쟁여놓은 콘돔 상자 중 마지막 상자였다.

 

   ‘…….’

 

   이전만큼 구겨진 표정은 아니더라도 히나타는 알 수 있었다. 코즈메가 굉장히 언짢아하고 있다는 걸. 본능대로 했다면 벌써 박스를 내던지고 다음 단계로 나아갔겠지만- 행여나 히나타에게 미움 살까 두려워지는 것은 이성의 판단이다. 한참동안 말도 못하고 고민하던 코즈메가 히나타의 쇄골 언저리에 머리를 묻었다. 덕분에 히나타는 코즈메의 꽁지머리를 만지작댈 수 있었다. 몇 번을 묶어도 서툰 흔적이 보였다. 밖에서는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히나타는 한참 고민하다 코즈메의 머리끈을 풀었다.

 

   ‘쇼요….’

   ‘응. 켄마.’

   ‘한 번만-’

 

   이런 식으로 맨살에 머리카락을 비벼대는 건 반칙이다. 더군다나 차가운 손끝이 허리에 닿는 것도, 나른한 눈으로 저를 뚫어져라 보는 것도. 한 번만 이라고 칭얼거리는 꼴이 꼭 아이 같아 히나타는 웃으며 알았다고 답했다. 물론 말을 뱉은 뒤로는 웃음이 새어나올 틈도 없었다. 아이 같다고 생각했던 거 다 취소. 흐린 오후의 벌건 시간의 다 흘러간 때가 되어서야 비가 그쳤다. 그런 창밖을 보며 사랑한다고 잔뜩 속삭여주던 코즈메의 목소리를 기억했고, 기억한다. 기억은 이렇게 생생한데 말이지. 절정에 이르렀을 때 분위기에 휩쓸려 안에다 해달라고 했던 것 까지 생각이 나자 얼굴이 화끈거린다. 씻고 온 사이 먼저 잠든 코즈메 옆에 누워 임신 테스트기를 한참 만지작대던 히나타는 과연 제가 임신일까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확실히 요 몇 주간 감정기복이 심하긴 했다. 여러 정황상 임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이지만 정말 그 한번으로 쉽게 될 일인가 싶기도 하고. 낮잠을 자서 그런지 밤이 깊어질수록 눈은 더 또렷해졌다.

 

   잠이 안 와?

   아냐 켄마는 얼른 자.

   싫어. 쇼요 얼굴 좀 더 보고 잘래.

 

   라고 다 졸린 눈을 한 코즈메 탓에 히나타는 저 먼저 자겠다며 눈을 꼭 감았다. 평소 습관처럼 히나타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고 잠에 빠진 코즈메는 그간의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밤은 더웠고, 끈적끈적한 공기는 어느덧 살갗까지 침투해 새벽잠을 괴롭혔다. 켄마, 켄마- 어슴푸레 밝아오는 여름의 아침은 다른 날보다 일렀다. 와중에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눈부시도록 선명해서 번쩍 눈이 뜨였다. 결연한 얼굴의 히나타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검사 결과가 표시된 테스트기였다.

* * *

   하나, 둘, 셋, 넷, 다섯…. 아침부터 토악질을 한 횟수를 세던 리에프는 다시 구역질이 나는 것을 느꼈다. 전날 주당으로 소문난 쿠로오와 과음한 탓에 숙취는 길게 이어졌고, 정신을 막 차렸을 때는 10시를 겨우 넘긴 때였다. 사색이 되어 휴대폰을 보았을 때는 회사로부터 온 부재중 전화와 쿠로오의 비웃음 섞인 문자로 도배된 후. 겨우 점심시간에 맞춰 회사 로비에 도착했더니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이고 있는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길게 늘어진 노란색 머리와 뿌리부터 자란 검은색 머리의 주인공은 고교시절을 함께한 선배이자 이제는 직장 상사인 코즈메 켄마, 따지고 보면 어제 술자리의 주인공 격인 사람이다.

 

   “뭐해?”

   “어?”

   “곧 닫혀.”

 

   가, 같이 가여!! 급하게 엘리베이터 문을 비집고 들어간 탓에 양 어깨가 얼얼했다. 열림 버튼이라도 눌러주면 좀 좋으련만 코즈메는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리에프 쪽으로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다. 형식적인 아침인사라도 할 겸 시선을 돌렸더니 어째 행색이 꼭 방금 출근하는 사람 같아 눈이 반짝였다. 지각하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다.

 

   “켄마상, 지각했을 때는 어떤 말로 둘러대죠.”

   “지각을 안 하면 돼.”

   “척 보아하니 켄마 상도-”

 

   리에프의 말을 자른 것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할 때 낸 소리였다. 그 소리가 마치 사형선고 같아 치를 떠는 한쪽과 달리 한쪽은 지나칠 정도로 태연했다. 시계를 보아하니 열두 시 사십 분. 어영부영 점심시간에 맞춰서 왔다만 점점 자리를 채울 사람들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가중된다. 그 때 코즈메 부서 직원이 복도 끝에서부터 걸어왔다. 리에프는 오늘이야 말로 코즈메가 꾸중 듣는 모습을 듣겠거니 은근슬쩍 귀를 기울였다.

 

   “어, 코즈메 팀장님. 꽤 일찍 오셨네요? 아직 점심시간도 다 안 끝났는데.”

   “쇼요가 자꾸 재촉해서…”

   “저 대충 얘기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는 전개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던 리에프를 깨운 것은 등을 툭 치는 익숙한 손찌검이었다. 대개 이런 손찌검의 주인공은 늙은 제 상사거나, 사람을 놀리는 것에 도가 튼 회사 선배거나. 다행히, 손의 주인공은 코즈메와 마찬가지 고교 선배이자 회사 선배인 쿠로오 테츠로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코즈메와 쿠로오를 번갈아 보던 리에프는 잊고 있었던 어제의 대화가 떠올라 아! 하는 탄성을 내질렀다. 쇼요가 너한테 고맙다고 전해달래. 무심하게 말하는 코즈메의 표정이 덤덤하다. 망연자실해진 리에프는 조금, 아주 조금 억울해서 울상이 되었다.

 

   동이 트자마자 검사한 테스트기의 결과 란은 분명 임신을 알리고 있었다. 코즈메는 더 확인할 것도 없어 그 즉시 회사에 연락을 넣었고 반차를 썼다. 그냥 하루를 통째로 쉬면 안 되겠냐고 툴툴댔지만 히나타가 기어코 반차까지만 쓰라고 말 한 탓이다. 코즈메는 여태 보여준 적 없는 분주한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주려는 듯 정성스럽게 아침까지 차렸다. 병원으로 가는 길, 혹시나 누가 히나타에게 손끝 하나 닿을까 경계했던 것은 두 말하면 입 아프다. 처음 확인해본 초음파 사진은 두 사람 모두에게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직은 너무 작은 형체, 앞으로 코즈메 부부와 함께하게 될 새 생명은 이제 4주째에 접어든다고 했다.

 

   쇼요, 먹고 싶은 거 없어?

 

   집으로 가는 길에 저더러 묻는 말을 가만히 곱씹던 히나타가 소리 내어 웃었다. 켄마가 이런 진부한 말을 하는 게 웃겨서. 다른 것은 없고 그게 이유였다. 8월 한여름에 접어든 날씨는 덥다 못해 숨이 턱 막혔다. 그래서 물었다. 켄마는 여름이 싫다고 했지? 잡은 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니, 쇼요랑 있는 여름은 좋아. 순 억지인 말이지만 왜인지 행복해서 마주보는 얼굴에 미소가 만연했다.

 

   나 이제 코즈메 쇼요 할래. 늦은 출근 준비를 하고 함께 쇼파에 앉아 손을 만지작대던 짧은 순간이었다. 이제는 히나타로 불리지 않을 쇼요가 켄마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켄마는 짐짓 심각하게 고민했다. 쇼요, 나 오늘 출근 안 하고 싶어. 하지만 쇼요가 생각하기로서니 유능한 팀장 켄마의 부재가 회사 직원들에게 얼마나 큰 리스크일까 싶어 서둘러 등을 떠민 것이다. 회사로 가는 내내 켄마의 머릿속에는 쇼요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회사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10분에 한 번꼴로 휴대폰을 확인하고 어떻게 하면 조기 퇴근을 할 수 있을까 궁리했다. 아직 몇 개비 남아 있는 담배 곽은 진즉에- 집 앞 쓰레기 수거함에 던져두고 온지 오래다. 때마침 전화를 걸었던 쿠로오는 그 말을 듣고 제법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퇴근시간. 누구보다 빨리 회사를 벗어난 켄마가 집 앞에서부터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바작바작 흐르는 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단지 조금 실감이 났다. 그리고 혹여나 이미 실감한 행복이 사라질까 혹시 하는 두려움을 느꼈다. 현관문을 열자 쇼파에 앉아있다가도 얼른 달려오는 쇼요가 저를 반긴다. 사라지지 않을 행복이다.

 

   이제는 코즈메 성을 함께 쓰게 될 가족을 꼭 끌어안은 켄마는 처음으로, 가장 싫어했던 여름과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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