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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이웃

시미즈 키요코 X 히나타 쇼요

W.우늉(@Narahan_star)​

◈ 알파오메가AU

◈ 여공남수 소재 주의해 주세요.

 

 

1.

   1002호에 사는 요시다 부인은 근래 8시쯤 부엌에 난 창으로 밖을 보거나 쓰레기를 가져다 버린다고 하며 현관 앞을 서성였다. 그녀가 특별히 시간을 칼같이 지켜 생활을 하는 건 아니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남편과 졸업이 코앞인 중학생 아들을 깨우고, 잔뜩 푸닥거리를 하며 배웅을 해주면 고 몇 시간만의 일에 힘이 쭉 빠지니 그제야 침대에 좀 누워 아침잠을 더 청하는 것이 낙이라면 낙이였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피로도 잊을 만큼 재미있는 일이 생겨버려 그녀는 두 사람의 배웅을 끝내도 주방과 현관 근처를 서성였다.

   한 달 전에 이사를 온 젊은 부부가 근래 아파트 최고의 화제로 전락해 버렸고, 그 젊은 신혼부부는 요시다 부인의 1002호와는 좀 넓은 복도를 마주하는 1004호에 입주해 왔기 때문이다.

   요시다 부인이 사는 아파트는 도쿄의 중심 자리에 위치해 있었고, 증축한 지는 시간이 좀 지났지만 깨끗하고 넓은,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중산층과 상류층의 사이에 껴 있는 사람들이 입주해 있는 꽤 좋은 아파트였다. 단지는 좁은 도쿄의 덜렁 한 채였지만 꽤 넓은 부지를 끼고 있었고, 무엇보다 중심지에 가까워 굳이 차를 끌고 나가지 않아도 어디든 대중교통을 타고 이동하기 매우 편리했다. 층마다 겨우 여섯 가구, 위로 올라가 꼭대기의 라운지와 작은 인공 화원, 그리고 지하의 피트니스센터 및 테니스장을 빼면 총 12층. 72가구가 입주해 있었지만 주민의 변동이 크게 없어 다들 알음알음 오래된 이웃이었다. 특히나 삭막하다고 할 수 있는 도쿄 생활에 그래도 꽤 교류가 있는 편이여서 몇 년 전에는 부녀회끼리 생활체육 모임도 창설했었다. 아침에 남편과 자식들을 보내고 나면 한가해진 그 부녀회의 멤버들은 하나, 둘 꼭대기의 라운지에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한다.

   이내 삶의 고달픔과 내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를 남편들의 행동, 혹은 자식들의 입시정보 따위를 공유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거리의 카페의 맛이 어떻다는 것, 뒷골목 작은 슈퍼의 채소가 싸고 싱싱하다는 것의 정보부터, 내 자랑, 네 자랑, 저 사람 험담 등의 사적인 이야기까지 커피 테이블을 오고 가고는 했다. 도란도란, 그녀들의 수다가 1층부터 12층까지 호수까지 정해 한 바퀴 돌다 보면 어느새 점심시간을 꼬박 지나고는 했다.

   그리고 한 달 전의 그날도 딱 그 정도의 수다가 오고 간 날이었다. 다만 그날은 마침 요시다 부인이 사는 10층의 2년째 비어 있는 1004호의 과연 언제 사람이 입주할 것인가가 주제였다. 며칠 전부터 뚱땅거리며 리모델링하는 소리가 꽤 요란했기 때문이다. 단순한 도배작업이나 조명작업이 아닌 듯 리모델링은 4주째 지속되고 있었고 주마다 1004호로 들어가는 직원들은 유니폼이 바뀌었다. 아니, 입주하기 전부터 저리 요란하다니, 10층에 사는 요시다 부인과 사코 부인, 그리고 9층에 904호에 사는 스즈키 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들어보면 별로 변동이 없을 이웃일 텐데, 잘못해서 이상한 사람이라도 입주해 봐라. 피 보는 건 같은 층 사람들과 바로 아랫집 사람들이었다.

 

   다행히 일주일 전부터는 소음이 줄어들었지만 1004호의 얼굴 모를 입주민들을 마주치기 전부터 이미 아파트의 부인들에게는 머리부터, 학력, 좋아하는 음식, 나이 대, 직업, 연봉, 가족관계마저 확정되다시피 말이 오고 간 이후였다.

 

   지속되는 한파에 약속은커녕 외출은 생각도 못하던 부인들로 라운지는 붐볐고, 모두들 손에 따듯한 차나 과자를 들고 1004호에 관해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불현듯 조용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뭐, 없는 사람을 도마 위에 올려 신나게 내리친 죄책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정말 우연으로 모두들 입을 다문 것 일수도 있었다.

 

   차갑게 식은 커피잔의 윗부분을 의미 없이 손으로 쓸던 요시다 부인이 무심코 창밖을 바라봤고, 소리 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노란 사다리차가 아파트의 10층까지 올라오는 걸 보며 깜짝 놀라 일어났다.

 

   어머, 어머, 벌떡 일어나 커다란 유리창 아래를 손가락질하는 요시다 부인을 따라 사다리차를 발견한 우아한 부인들의 다급한 눈빛이 커피 테이블 위를 오고 갔다. 알 수 없는 오랜 리모델링과 길어진 한파 덕분에 호기심과 끝을 알 수 없는 지루함에 지쳐 있던 부인들은 언제나 부르짖던 ‘교양’을 차가워진 찻잔과 함께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가장 먼저 일어난 건 10층에 살고 있던 요시다 부인과 사코 부인이었다. 차마 따라가지 못하는 나머지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연신 가리키며 문자를 보내라는 무언의 아우성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재빠르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다 합쳐도 72가구뿐인 데도 이 좋은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4개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밑에서부터 이사가 시작된 것인지 평소보다 한참을 기다리다가 겨우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띵동,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이미 노란 조끼를 입은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박스와 가구를 나르고 있었다. 활짝 열린 1004호의 문은 아까 두 부인이 라운지로 올라가기 전만 해도 자신들과 같은 베이지색이었는데 어느새 고급스러운 재질의 검은색 문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구와 박스 옮기는 노란 조끼를 입은 직원들과 다르게 회색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은 문고리에 매달려 도어록을 달고 있었다. 초인종 옆으로 붙어있는 고급스런 크리스탈 재질의 문패에는 정갈한 한자로 “淸水”라고 음각되어 있었다. 투명한 문패에 유난히 아름다운 쪽빛을 띄는 한자가 빛을 받으며 문패 안으로 색색이 부서져 내렸다.

   야! 조심해! 그거 N사 책상이야! 기스라도 나면 우리 죽어!

   집 안쪽에서는 사다리차로 올라오는 커다란 가구를 옮기는 직원들이 기겁을 하며 악을 질렀다. 슬금슬금 걸음을 옮기며 활짝 열린 1004호의 안을 바라보던 두 부인들이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요시다 씨, 방금 N사 책상이라고 안 했나?

   N사?

   나 남편이 작년에 사장이 그 N사 책상을 샀다고 내내 자랑을 해대서 시무룩하길래 주문하려고 찾아봤거든…, 근데 가격도 가격인데 지금 주문해 봤자 1년 2개월 후에나 만들기 시작한다는 거야. 전부다 수제로 하는데 주문이 너무 밀리고 나무도 자기 사에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근데 그 책상이 지금 1004호로 들어간다는 소리야? 요시다 부인이 아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슬그머니 본 리모델링을 한 1004호의 안쪽은 자신의 집과 같은 구조였다고 거짓이라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말을 했지만, 아파트는 도쿄에서도 그래도 좀 돈을 번다는 중산층이 입주해 있었다. 겨우 72가구에 엘리베이터가 4대, 외부인이 들어오려면 따로 경비실에 신분증을 맡겨야 들어올 수 있었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한 가구당 베란다를 포함한 면적은 도쿄에서는 믿을 수 없는 60평대란 소리다. 집은 층과 호수에 상관없이 동일한 60평대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4호의 새 입주민은 그것도 부족한지 현관의 붙박이장을 전부 들어냈다. 적어도 1.5배는 더 커진 현관은 위에 자동센서를 탑재한 평범한 원형 등을 떼어내고 카페에서나 다는 듯한 환한 LED 조명을 대신 달아 놓은 것이다.

   현관을 지나면 깨끗하고 밝은 색으로 도배가 새로 된 거실이 언뜻 보였다. 보통은 나무마루로 바닥을 마감하는데 희한하게 거실은 온통 푹신해 보이는 하얀 카펫으로 깔아 놓았다. 커다란 베란다 창으로는 주문을 하면 적어도 1년은 기다려야 한다는 그 N사의 책상을 낑낑대며 노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옮기고 있었다. 무거운 짐을 옮기지만 손길은 무척이나 세심했다. 척 봐도 비싼 가구들이라 최대한 신경 쓰며 부드럽게 옮기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엘리베이터 중 2대는 끊임없이 1층과 10층을 오고 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노란 유니폼의 직원들은 대부분 커다란 가구보다는 메거나 들 수 있는 집기들을 옮겼는데, 우아한 찻잔과 접시, 그리고 골프백을 들고 멀뚱히 서있는 부인들을 지나쳐 1004호로 들어갔다.

   이사업체의 직원들이 내린 엘리베이터를 따라 3호와 4호 엘리베이터에서 이내 다시 한 번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슈트를 입은 멀쑥한 사람들이 줄줄이 내렸다. 단정하게 정리해 머리를 뒤로 넘긴 남자들은 가슴에 붉은색 명찰을 하고 손에는 투명한 옷 커버를 씌운 옷들을 옷걸이 채로 들고 줄줄이 내려 부인들의 입이 무의식적으로 커다랗게 벌려진다. 어떻게 다 탔는지, 옷걸이를 양손에 들고 있던 남자들이 얼추 내리자 다음 엘리베이터에서는 역시나 붉은색 명찰을 한 여자들이 작거나 큰 벨벳 상자들을 들고 역시 줄을 맞춰 내린다. 매니저로 보이는 원숙한 여자가 어느새 활짝 열어놓은 현관문 옆에 태블릿을 들고 명찰을 단 사람들을 이리저리 지휘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옷걸이의 커버를 들춰보거나 상자를 살짝 열어보며 체크를 하기도 했다.

 

   이쯤 되니 새로 온 이웃에게 인사를 하겠다는 핑계로 1004호 앞에서 얼쩡거리기 미안해졌다. 요시다 부인과 사코 부인은 서로 애매한 눈짓을 보냈다. 스스로 말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중산층에서도 급이 있기 마련이었고, 그 급의 차이는 위로 올라갈수록 더욱더 적나라했다. 이사하는 꼬락서니만 봐도 답이 나온다. 중산층 어쩌고 했지만, 자신들과 급이 다른 상류층이 왠지 모르지만 이 아파트로 입주를 해오는 것이다. 계속 바빠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서있기 왠지 무섬증이 일고 막상 떠나려니 그것도 무안하다. 그러니 자연히 눈동자는 허공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떠야 하는 거 아니냐, 사람들로 붐비는 저 검은 현관문을 바라보던 두 부인의 뒤로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다가왔다.

 

   “무슨 일이시죠?”

   “아.”

 

   깨끗하고 고요한 미성이었다. 높낮이의 변화가 거의 없어 얼핏 차갑게도 들렸다. 부인들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다가 꽁꽁 얼어붙었다.

 

   160cm가 채 넘지 못하는 두 부인보다 머리 하나가 더 위에 있었다. 신고 있는 검은색 하이힐 때문이거니, 얼추 상상을 해봐도 다리도 길쭉하고 팔도 길쭉했다. 아니면 머리가 너무 작아 그렇게 보이는 걸 수도 있고. 가슴 윗동을 맴도는 머리카락은 하도 새카맣게 반짝거리고 있어서 불빛 아래서 오히려 푸른빛이 돌았다. 새하얀 얼굴, 시원하게 떨어지는 코와 누가 섬세하게 그린 듯한 입술 옆의 콕 찍힌 점까지 아름다웠다. 그 떨어지는 코에 걸린 무테안경 너머로 채도가 낮지만 반짝거리는 맑은 눈동자가 두 부인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었다. 잘 다져진 커리어를 걸어온 것처럼, 검은 재킷과 하얀 블라우스, 핏이 우아하게 떨어지는 트라우저를 입고 있는 비즈니스 우먼이었다. 목에 걸린 얇은 목걸이에 작은 반지가 대롱거렸고, 귀에는 아주 작은 피어싱 형태의 귀걸이를 걸고 있었는데, 드비어스(De Beers) 사의 다이아몬드임이 틀림없었다.

 

   대롱대롱, 과하게 치장을 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꾸미지 않은 것도 아니었는데, 그 모든 값진 보석들을 뒤로 하고서도 여자는 가장 빛이 나고 있었다. 키가 작은 부인들과 눈을 맞추려 내리깐 긴 속눈썹이 볼 아래로 길게 그림자를 지는 듯 하니, 맙소사, 사코 부인이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뒷걸음질 쳤다.

 

   문 앞에서 줄줄이 들어가는 직원들을 일일이 간섭하고 있던 매니저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여자를 발견하고 서둘러 다가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시미즈 님, 엔쿠와 매니지먼트의 시니어 매니저 와타베 사유미입니다. 서재의 책과 아기 방의 가구를 빼면 대부분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오후 5시까지는 꼭,”

   “아, 잠시만요. 이분들과 먼저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다려주시겠어요?”

   “예, 시미즈 님. 죄송합니다.”

   뒤에 물음표가 콕 찍혀 있는 정중한 물음이었지만 묘하게 위압적이었다. 매니저는 말을 하다가 잘렸는데도 불구하고 표정변화 없이 깊게 허리를 다시 숙였다. 방금 전까지 현관 앞에 서있어도 쳐다보지도 않던 두 부인들에게도 깊게 허리를 숙였다. 과한 예였다.

 

   매니저는 서둘러 현관 앞,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자, 아니 시미즈는 그걸 잠시 쳐다보다 이내 두 부인들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죄송합니다. 시미즈 키요코라고 해요. 내일이나 모레 중 입주하게 될 것 같은데…, 만나서 반갑습니다.”

   입꼬리를 살짝 휘며 시미즈는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조차 하얗고, 손톱은 관리를 받는 것인지 진주알같은 색을 띠면서 그 곧은 손가락에 매달려 있었다. 요시다 부인이 얼떨결에 손을 잡고 악수를 했고 이내 사코 부인과도 악수를 했다. 적당히 힘이 실린 아주 그럴듯한 악수였다.

   시미즈는 들고 있던 가죽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도중에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시미즈의 가방에서 나는 소리였지만 뒤지다가 화면을 슬쩍 확인하고는 무시했다.

   “제가 일이 너무 바빠서 리모델링하는 도중에 들르지 못했습니다. 소음이 많이 났다고 보고를 받았는데 정말 죄송해요. 오늘 안으로 분명 끝날 겁니다.”

   “어머, 아니에요…. 그, 그렇게 소음이 많이 나지도 않았고요.”

   커피 테이블 위를 오가는 그 수많은 소음 불평을 가장 많이 한 사코 부인이 화들짝 놀라 손을 흔들었다. 요시다 부인도 옆에서 맞장구를 치며 괜찮았다고 손사래를 쳤다.

   가죽가방을 뒤지던 시미즈가 두 부인의 행동에 후후, 낮게 웃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가죽가방에서 나온 건 명함 케이스였고, 시미즈는 그 중 두 장을 부인들에게 건넸다. 두 부인은 예의를 차리려고 명함을 잠시 바라보는 척을 했지만 사실 시미즈가 웃으면 웃는 대로, 말하면 말하는 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어서 막상 명함에서 눈을 떼니 금박으로 입혀진 고급스러운 영어가 적혀져 있다,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했다. 아무튼 고급스럽고 빳빳한 명함이라니, 역시나 엄청난 커리어 우먼이 확실했다. 두 여인의 눈동자에 금방 동경이 서렸다.

   “제가 점심시간이라 잠시 빠져나온 거라 금방 회사로 돌아가야 해서요, 혹시나 불편하신 점이나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번호로 전화를 해 주세요.”

   시미즈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약간 숙였다.

   “언제든지.”

   두 부인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채로 말 한마디 못 뱉고 고개만 열혈이 끄덕였다.

   “허억-, 엄, 엄청 예뻤어…, 사코 씨….”

   “으응, 그리고 엄-청 똑똑해 보였고….”

   시미즈는 가볍게 목례를 한 다음 아까 그 매니저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그 사람들과 거리를 벌린 두 부인들은 참아왔던 숨을 헐떡거리며 방금 무얼 본 건지 제대로 인지하려고 노력했다. 두사람은 한참이나 거리를 벌린 후에 겨우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을 쳐다보았다.

   『 Lauren Lynch Wealth Management: 시미즈 키요코 淸水 潔子 - Vice President & CFO 』

   그리고 다음날 아파트의 71가구는 각각 소고기 세트와 고급 료칸의 이용권을 정장을 입은 공손한 남자에게 빠짐없이 건네받았다.

2.

   쇼요는 오메가였다. 그것도 태어나자마자 약지에 색색의 고운 천으로 돌돌 둘러매어진, 혼처가 정해진 오메가. 심지어 남자 오메가.

   그리고 딱 작년 이맘 때 결혼한 쇼요의 알파는 쇼요보다 무려 일곱 살이 많았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친척이 아기를 낳아 병원으로 끌려 왔다가 칠삭둥이로 태어난 쇼요의 인큐베이터가 있는 중환자실 앞에서 움직이지 않아 난리가 났다고 한다. 겨우 일곱 살인데 알파는 알파라 부모님과 친척들, 간호사, 의사, 그리고 병원의 상주경찰이 와서야 겨우 끌려 나갔다고 했다. 평소에 감정변화가 별로 없던 아이가 끌려가며 숨이 차도록 울어 대니 부모가 놀라 도대체 왜 그러냐 물었더니 안에 제 오메가가 있다고 병원 한복판에서 커다랗게 말했던 사람이었다.

 

   오메가와 알파라니. 이 얼마나 케케묵은 단어인가. 여자와 남자를 떠나 제 3의 성을 가리키는 이 단어는 현재에는 거의 쓰여지지 않았다. 이유란 별다를 것이 없었는데, 한때 과학계에서 ‘우성인자’라 떠받들어지던 오메가와 알파가 알 수 없는 개체 수 감소로 이제 거의 발현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놈의 ‘우성개체가’ 뭐길래 개체감소도 못 막는 거냐 비웃음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오메가야 생산개체라고 비꼬듯이 불려지는 것에 비해 알파는 확실한 ‘우성개체’였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외모부터, 근력, 머리, 모든 것이 뛰어났다. 그 남들보다 뛰어난 알파들은 오랫동안 부와 명예를 축적해 왔지만, 마침내 개체 수가 인구의 1% 아래로 떨어졌을 때 제3의 성을 밝히는 것보다 숨기는 것을 선택했다.

 

   체질을 숨기는 건 쉬웠다. 국가들이 주민등록증에 제3의 성을 기입하지 않게 된 지 30년이나 넘었고, 체질을 판단하는 기관은 18년 전에 스웨덴에 있던 것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고 싶냐고? 제 오메가가 중환자실 안에 있다는 어린 알파의 외침에 부모의 턱이 부러질 듯 크게 벌려졌다는 소리다.

 

   어린 알파는 세기의 마지막 알파라고 나름 이쪽 세계에서 여겨졌던 모양이다. 평생 제 짝은 만나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나 했는데. 그날로 칠삭둥이 쇼요의 손목에 오색천이 배배 감긴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지와 상직이 제대로 생기기 전부터 쇼요의 손을 잡아주던 알파가 쇼요의 세상의 전부였다. 쇼요의 알파는 무척이나 쇼요를 애지중지 해왔고, 쇼요는 그 안온하고 절대적인 사랑에 지금껏 안락하게 안주해 왔었다. 제 알파를 따라 금세기 마지막 오메가라는 별명 아닌 별명에 쇼요의 알파는 물론이거니와, 쇼요의 부모님, 알파의 부모님, 나이가 한참이나 많은 친구들, 그 모두가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하아.”

 

   두꺼운 커터칼로 박스 위에 있던 테이프를 잘라냈다. 박스 위에 붙은 운송장에는 크게 “마이돌 – 인형샵: 구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홈쇼핑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쇼요의 오래된 취미 중 하나였다. 어렸을 때는 꽤 몸이 약해서 대부분 집에 틀어박혀 있었는데,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온 쇼요의 알파가 작고 검은 플라스틱 하나를 건네주는 게 아닌가. 뭣도 모르고 그 플라스틱 위에 그려진 아저씨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깔깔 웃었는데. 쇼요의 알파는 그것으로 재미있는 장난감이나 책으로 교환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7살짜리 아이에게 가르쳐 준 건, TV로 하는 홈쇼핑과 태블릿으로 하는 인터넷쇼핑. 처음이야 뭣도 모르고 그 플라스틱의 번호를 불러 대며 신나게 쇼핑을 했는데 3일 후에 들이닥친 택배 무더기를 보고 경악한 엄마에게 등짝을 맞으며 플라스틱 조각을 뺏겼다. 알고 보니 쇼요의 알파가 건네 준 플라스틱 조각은 한도가 없는, 연회비가 일년에 35만 엔이나 나가는 VVIP용 카드였고 알파의 부모가 알파에게 용돈을 대신하라며 건네 준 거란다.

 

   지극히 평범한 서민에 불과하던 부모님이 헐레벌떡 예비사돈에게 전화를 건 것은 당연했다.

 

   예비사돈, 그러니까 외국에 계시던 시미즈 씨는 직통전화로 온 크게 웃더니 당황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며 카드를 수거해갔다. 아직 어린아이에게 확실히 부담스럽겠다는 호탕한 웃음과 함께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사돈가족의 비상적인 기행들에 뇌를 몽땅 흔들어 놓는 나날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내심 안도했다. 다음날에 한도가 800만 엔인 반짝거리는 골드카드를 들고 시미즈 씨의 비서가 방문할 줄도 모르고 말이다.

 

   부모님의 강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쇼요는 그 골드카드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자면 그 어린 것의 경제관념을 망쳐 놓은 주범이었지만, 그렇다고 쇼요가 무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쇼핑이 즐겁다기보다는, 쇼핑을 하고 나면 두 손 가득 그것들과 비슷한 물건들을 들고 찾아오는 그의 알파를 기다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버릇처럼 남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테이프를 가른 상자를 나름 힘차게 열자 안에는 괴상한 동그란 인형이 들어있었다. 뚱뚱하고 새카만 몸뚱어리에 머리카락처럼 더덕더덕 붙은 주황색 실. 역시나 새카만 색이라 구별이 가지 않는 부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자 괘에에엑, 하는 기괴한 소리가 났다. 쇼요는 좀 시무룩한 표정으로 인형을 꼭 안았다.

 

   “배고파….”

 

   시계를 슬쩍 바라보았다. 얼추 시계바늘이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랜만에 한 택배에도 쇼요는 즐겁지 않았다. 새로운 집에 이사를 온지 어느새 4주가 넘어갔다. 새로운 집, 새로운 풍경,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들, 호기심이 많고 들쑤시길 좋아하는 쇼요에게 딱 걸맞았다. 어화둥둥 알파의 손에 붙잡힌 인생은 매우 평탄했다. 뭐, 금세기 마지막 오메가라 그런 건 아니지만, 어딜 가나 빠지지 않고 귀여움을 받을 만한 성격이긴 했다. 기실 자기보다 적게는 5살, 많게는 10살 이상 차이 나는 제 알파의 친구들과 처음 만났을 적에도 10분 만에 그 사람들 무릎위에 올라가 마카롱이나 까먹지 않았던가. 적나라한 적의는 살이 에일 정도로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심지어 그 적의를 받을 만한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해 더욱더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배고픈 걸 도저히 못 참는 쇼요가 굳이 밖을 나가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시계를 흘끔흘끔 바라보며 바닥에 한참을 그대로 앉아 있자니 현관문 쪽에서 삑삑, 거리는 소리와 함께 철컹이며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현관의 대리석 바닥에 몇 번 부딪히는 또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내 쇼요의 알파가 거실 안쪽으로 들어오다 거실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는 제 어린 오메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쇼요?”

   “키요코 상….”

   머리를 웬일로 뒤로 묶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제 알파, 시미즈 키요코였다. 나갈 때는 분명 밤색 코트를 입고 나갔는데 들어올 때는 검은색 긴 롱코트를 입고 들어왔다. 잠깐 현관문을 여닫았는데도 찬 바람이 휭, 하고 들어오니 쇼요가 가만히 있다가 부르르 떨었다.

   “왜 바닥에 있어. 날씨가 추운데.”

   키요코는 백을 바닥에 던지고 황급히 소파에 있던 담요를 가지고 왔다.

 

   “저번에도 차가운 데 앉았다가 아팠잖아, 쇼요.”

   다정하고 걱정스런 목소리였다. 그녀의 어린 오메가 옆에 있는 커터칼을 보더니 곧고 아름다운 아미가 슬쩍 구부려졌지만 질책을 하는 대신 왠지 시무룩한 쇼요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매어 주었다. 대신 툭, 하고 공구용으로 넓고 큰 커터칼을 옆으로 슬쩍 발로 밀었다.

   키요코에게는 차가운 바람과 겨울 내가 났다. 머리카락이 몇 주째 계속되는 한파에 살짝 얼었다가 따듯한 집의 온기에 뭉근하게 녹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새하얀 얼굴은 추위 때문인지 창백했고 코끝과 귀만 유난히 빨갰다. 하루 종일 힘내서 일을 했을 텐데, 코트도 채 못 벋고 시무룩한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그 예쁜 얼굴에 걱정을 피어 오르게 한 것이 못내 미안했다. 그리고, 굳이 이렇게 티를 내야하는 어설프고 어리광쟁이인 자신도 못마땅하고.

   쇼요는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키요코의 턱에 쪽, 뽀뽀를 했다. 히히, 어서 와요.

   키요코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몇 번 빠르게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깜빡일 때마다 사그락, 사그락,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이내 후후, 창백한 얼굴에 웃음이 피어 올랐다. 눈꼬리마저 환하게 구부러졌다. 키요코는 고개를 숙여 쇼요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비볐다. 뭉근한 살덩이는 옅은 화장품 냄새가 났다.

   “우웅….”

   거짓말, 가볍다고 했잖아. 약간 차가운 입술은 살짝 벌려 쇼요의 입술을 가볍게 잘근잘근 빼물다가 이내 쪽쪽 빨아댔다. 아랫입술을 그렇게 빨다가 헐떡대며 열려진 입술 사이로 살덩어리를 밀어 넣어, 꼬르륵.

 

   키요코는 슬쩍 비비던 입술을 뗐다. 퇴근하기 전에 최대한 짙게 바른 입생로랑 12호는 예상대로 쇼요의 입술과 그 주변에 잘 번져 있었다. 쇼요는 그 짧은 키스에 숨이 막혀 헐떡대기 보다는 부끄러워 온몸이 빨개진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굳어 있던 키요코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걸 막을 수가 없음이라. 볼에 키스를 한 번 더 하니 립스틱자국이 선명했다. 머리카락과 귓볼, 배까지 쓰다듬어준 키요코는 일어나 코트를 벗어 주방 식탁위에 올려놓았다.

   

   “냉장고에 있던 거 좀 먹었어? 빵도 사다 놨었는데.”

 

   냉장고로 다가가던 키요코가 슬쩍 아일랜드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쇼요가 좋아하는 베이커리에서 사온 빵과 과자들은 아침에 출근하기 전과 똑같이 놓여있었다. 테이블과 주방이 유난히 깨끗해 눈썹 한쪽이 슬쩍 올라간다.

 

   키스의 여파에 헤롱대던 쇼요가 슬쩍 일어났다. 이내 담요와 품에 인형을 꼭 앉고 졸랑졸랑 제 알파의 뒤를 쫓아갔다.

 

   “그…, 갑자기 속이 너무 느글거려서 못 먹었어요….”

 

   주저하며 눈치를 보는데 애만 끓는다. 그럼 하루 종일 굶었다는 거잖아. 키요코는 화낼 생각조차 못했다. 화는 났지만, 그 화의 방향이 쇼요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애가 굶는지도 모르고 종일 일만 해댄 스스로와, 못 먹는 걸 해놓고 가버린 가정도우미에게 화가 난 것이다. 생각해보면 도우미의 잘못도 아니었다. 쇼요의 입맛은 10분마다 바뀌었고, 가정도우미께서 해놓고 간 음식은 바로 어제 쇼요가 먹고 싶다고 신나게 노래를 불러 대던 돈까스 덮밥과 간장으로 잰 닭고기 찜이었다. 심지어 디저트가 궁할까 복숭아로 만든 젤리까지 구석에 고이 놓아져 있었다. 비록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들은 주인에게 손가락 하나 닿지 못했지만 말이다.

 

   냉장고를 열어본 키요코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쇼요…, 그럼 오늘 하루 종일 굶은 거야?”

   “으음, 아니요. 그, 아이스크림 먹고…, 근데 속이 울렁거려서. 그리고 나 순두부찌개 먹고 싶어서…, 키요코랑 같이 먹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속타는 제 알파 맘도 모르고 히죽 웃는 꼴이 다른 사람이 봤다면 복장이 터졌겠지만, 키요코의 눈에는 애잔하고 안쓰러웠다. 결국 찬 음식만 조금 퍼먹고 종일 굶었다는 소리잖아?

 

   키요코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눈썹을 억지로 끌어 내렸다.

 

   “그럼 내가 나가서 사 올게. 금방 갔다 올 테니까 따듯한 차라도 마시고 있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고 코트를 집어 들었다. 말똥말똥 인형을 들고 그녀를 쫓아다니던 쇼요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히죽 웃는다.

   “저도 같이 나가요! 나가서 외식하면 되죠.”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밖은 추웠다. 한파는 며칠째 지속되고 있었고, 가까운 바다도 파도와 함께 얼어버렸는데. 이렇게 솜털이 보송송한 애를 데리고 나갔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었다. 입술 주변에 번진 12호 립스틱과 볼에 선명한 입술자국을 매달고 눈만 동글동글하게 뜨고 있으니 밖에 잘못 데려갔다 가는 누가 홀랑 주워 가 버릴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키요코가 쇼요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질책할 수는 없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다정한 웃음기가 있었다.

 

   “밖에 추워. 내가 금방 다녀올게. 도로도 얼어서 위험해.”

 

   햇살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나풀거렸고, 코트자락을 잡은 손가락이 고집스럽다. 안타깝게도 시미즈 키요코는 제 오메가한테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늘도 아마 1패 추가일 것 같은데.

 

   “키요코 상만 나가면 제 것만 사 올 거잖아요.”

   “아니야, 내 것도 같이 포장해가지고 올게.”

   물론 거짓말이다. 두 개보단 한 개가 조리나 포장이나 더 빠르게 된다. 세상만사 시간은 제 관할이 아니었지만 돈의 힘을 빌리자면 없던 기적도 만들어내지 않나? 그것이 남의 것을 빼앗아 오든, 뭐든. 위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라는 소리다. 그러니까 자본과 최소한의 인풋을 넣으면 가장 빨리 쇼요의 주린 배를 채워줄 수 있었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거기에다가 입술에는 12호 립스틱을 가득 묻히고 이게 무슨 소리야. 키요코는 한숨을 쉬면서 테이블 옆의 물티슈를 몇 장 뽑았다. 볼에 살이 가득 올라 손가락으로 쥐니 말랑말랑 했다.

 

   “으응.”

 

   잔뜩 번진 립스틱을 살살 닦았다. 살결에 흠이라도 날까 섬세한 손길이었다.

 

    “코트랑 목도리랑, 아 패딩도 입고와. 나 주차장가서 히터 좀 틀어 놓고 있을 게. 주차장 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

   “아니에요. 저 1층 앞에 있을 게요. 키요코 상이 차 끌고 오면 로비에서 기다렸다가 쏙 들어가면 되지.”

   그리고 이렇게 마구 안아주면 돼요. 쇼요는 키요코를 꼭 껴안았다. 한없이 가녀릴 것 같은 미인은 의외로 뼈대가 꽤 굵고 몸은 단단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그 단단하고 탄력적인 몸이나 몽실한 젖가슴은 온전히 쇼요의 것이어서 얼굴을 묻고 마구 비볐다. 키요코에게서는 언제나 좋은 향이 났다.

   하얀 블라우스에 아직 지워지지 않은 립스틱 자국이 옅게 묻어났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조심해서 내려와야 해. 끈덕진 알파는 현관을 나서기 전까지 옷을 챙겨 입으라 잔소리를 하며 풋풋한 얼굴에 잔뜩 키스세례를 쏟았다. 제 알파의 페로몬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워를 한 어린 오메가가정신을 못 차리고 눈이 풀려 주방에서 한참이나 헤롱거렸다.

   쬭, 눈두덩이와 입술에 진하게 뽀뽀를 한 키요코가 옷을 입으라 말을 하고 문을 열었다.

   “후후….”

   제 것에 도장을 찍는 일은 즐거웠다. 결제서류들 따위가 아니라 말이다. 주머니 속의 키로 일단 시동버튼을 누른 키요코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의미 없이 웃었다. 감정표현이 크게 없다고 어렸을 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상담을 받았을 때는 짜증만 났다. 자신에게 있는 문제가 뭔 지 이미 알고 있었기에 쓸데없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키에 달랑이는 헤진 털인형은 쇼요가 열 넷에 만들어준 걱정인형이었다.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면 꼭 저와 같은 온기와 향이 나는 것 같았다.

 

   “어머, 안녕하세요, 시미즈 씨.”

   “네. 안녕하세요. 요시다 씨.”

    1002호에서 사는 요시다 부인이었다. 이사하기 전날에 처음 마주쳐 몇 번 안면이 있는 키요코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호호, 얼굴을 붉히며 엘리베이터 쪽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반도 차지 않은 쓰레기 봉투가 달랑거린다.

   아침에도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그녀와 자주 마주치던 키요코의 눈동자가 그 빈 쓰레기 봉투를 잠시 따라가다가 이내 엘리베이터로 시선을 다시 옮겼다. 뭐, 옆집 여자가 쓰레기를 하루에 두 번을 버리던, 세 번을 버리던 그녀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궁금하지도 않고.

   곧은 자세로 지갑과 차키를 들고 서있는 키요코를 슬쩍슬쩍 바라보던 요시다 부인이 슬쩍 입을 연건 둘이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고 난 후였다.

   “날이 요즘 너무 춥죠. 이 저녁에 어디 가시나 봐요?”

 

   요시다 부인은 분리수거장이 있는 1층을 눌렀고, 키요코는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된 지하 2층을 눌렀다.

 

   “아…, 네. 임신을 했는데 입덧이 좀 있어서요.”

   “어머?”

 

   요시다 부인은 깜짝 놀라 자동적으로 키요코의 코트자락에 잘 숨겨져 있는 배 부분으로 시선이 향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 시미즈는 임신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완벽했다.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는 귀걸이는 저번처럼 귓볼에 딱 달라붙는 피어싱 형태가 아니고 작은 술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자세는 곧았고, 회사에서 막 돌아왔다 다시 나가는 것처럼 완벽한 옷차림이었다. 신도 굽이 꽤 높은 앵클부츠 형태의 부티구두를 신고 있었다.

 

   임산부가 꾸미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었다. 임신은 몸에 큰 부담을 주고, 때때로 자주 부어 오르기까지 했으니 하이힐이나 핏이 딱 떨어지는 비즈니스 슈트가 편할 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초기, 인가. 차마 불편하지 않냐는 무례한 말까지는 던질 수가 없어 눈치를 보고 있자니 어느새 1층이었다. 주저하며 아무리 시간을 끌어도 곧 내려야했다. 요시다 부인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그저 축하의 말을 건넸다.

 

   “저기, 축하드려요. 정말 예쁜 아이일 것 같아요.”

   “아.”

   스르르 다치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무표정했던 미인이 싱그럽게 웃었다. 입꼬리만 슬쩍 올리는 게 아니라 이내 눈꼬리도 같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감사합니다.”

   엘리베이터는 닫혔다.

 

   “허….”

 

   저렇게도 웃는구나. 앞집의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에 허겁지겁 차지도 않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외투도 잊고 뛰쳐나오는 바람에 요시다 부인은 부르르 떨었다. 바보 같은 결정이었지만, 근래 아파트 부녀회에서 최고의 화제로 떠오른 시미즈 키요코 씨를 보기 위해서라면 감당해야 할 고통인가 보다.

 

   완벽한 비지니스 우먼, 젊은 나이에 외국에 본사가 있는 아주 유명한 증권회사의 CFO, 그러니까 최고재무책임자였다. 맙소사, 증권회사의, 그것도 일본 지사가 아닌 본사의 CFO라니. 평생을 가도 만나지 못할 사람이었다. 감정의 변화가 별로 없는 무덤덤한 얼굴마저 카리스마로 보였다. 높은 지위와 부를 가졌다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건방지지도 않았다. 적당한 매너와 반듯한 자세, 예의는 조금만 그녀와 이야기를 해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같은 회사의 일본 지사에서 일하는 703호의 쿠시 씨는 그의 부인에게 시미즈 키요코의 이야기를 듣더니 벌벌 떨며 당장 과일을 들고 인사를 하러 갔다 오기도 했다. 인사라고는 했지만 일종의 눈도장을 찍을 수 있을까 사심을 가지고 들른 것 같긴 하지만. 쿠도 씨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층의 회사를 다니는 모든 사람도 앞다투어 1004호에 과일이나 음식, 혹은 사심이 적나라한 고기세트를 들고 찾아가는 해프닝도 있었다.

 

   도대체 저런 사람이 왜 이런 아파트에 입주를 했는지는 몰라도, 젊은 시미즈 키요코가 50대 전후반의 아파트의 부인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 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진짜 그 어려 보이는 남자랑 신혼부부가 맞구나…. 아침에 시미즈 키요코가 출근을 하면 눈에 올망졸망 졸음을 달고 나오는, 그러니까 남자가 아니라 오히려 소년으로 보이는…, 그, 백수.

 

   아니. 그럼 지금까지 임신한 부인은 일을 하고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서 내내 놀았던 거야? 시미즈 키요코는 때때로 이른 저녁이나 늦은 밤에 아파트 밖으로 나가 음식을 사왔다. 근래에 한파 때문에 거리에 사람도 없었는데 꼬박꼬박 나간 이유가 그럼 입덧 때문이었나. 구하기 힘든 딸기를 비닐봉지에 담아 걸어오던 그녀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아니, 임신한 부인이 먹고 싶다는데 이 추위 속에 자기가 나간 것도 아니라 홀로 내보냈다고? 이름, 이름이 뭐였지…? 시미즈…, 시미즈 쇼, 쇼 뭐였는데.

 

   쓰레기를 버리고 잠시 생각해 봐도,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아 끙끙대는데 로비 앞에서 밝은 머리가 나풀거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 눈 위를 굴러도 데굴데굴 잘만 굴러다닐 것 같은 소년 같은 남자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가까이 주차를 한 검은색 벤틀리에 쏙 들어간다. 잠깐 열린 차 안에 시미즈 키요코가 웃고 있었다.

 

   시미즈 쇼요! 시미즈 쇼요(翔陽)였어! 저 밝은 머리를 보자 자연스럽게 이름을 떠올랐다. 이름에 태양이 들어가 있어서 있다. 요시다 부인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심지어 운전도 부인한테 시키네. 요시다 부인의 눈에 기묘한 질투와 적의가 서렸다.

 

3.

 

   “아파….”

 

   생명의 잉태는 신비로운 게 확실했지만, 그만큼 동일한 고통과 인내를 수반했다. 제 몸의 일부가 아니었던 것이 생겨나는데 정상이면 그게 더 이상했음이라, 올해 갓 성년을 맞이한 오메가도 마찬가지였다. 아주 초기에 시작한 입덧은 먹는 것이 인생의 큰 즐거움 중 하나라 꼽았던 쇼요를 너무나 지치게 했다.

 

   먹고 싶은 게 생겨 뚝뚝 울다가도 막상 눈앞에 있으면 울렁거렸다. 그러다가 식욕이 돌아 왕창 먹다 보면 그날은 반드시 체해 변기 앞에 쪼그려 구역질을 해야 했다. 평소에 마트에 신나서 가면 쳐다보지도 않던 과일이나 샐러드가 그나마 목구멍으로 제대로 넘어가는 것이 너무 억울해서 쇼요는 살수가 없었다. 새벽 5시면 일어나서 잔뜩 뜀박질을 하던 체력도 급속도로 나빠졌다. 새벽 5시는커녕 키요코가 출근하는 8시가 넘긴 시간에 간신히 일어났다. 먹지를 못하는데 몸은 띵띵 부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특히나 눈과 볼이 많이 당겼다. 아직 배가 많이 나온 것도 아니었는데 조금만 걸으면 허리와 다리, 그리고 배가 자주 아파 헉헉거리며 옆의 구조물을 잡는 걸 보고 키요코가 외출을 웬만하면 삼가라고 말할 정도였다. 자기가 없는 새에 넘어지면 어쩌냐는 걱정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쇼요는 스스로 어른이라 참아 넘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뭐, 의지가 있어 참아 넘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고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모든 고통보다 쇼요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밤중에 일어나 만두가 먹고 싶어 혼자 눈물을 뚝뚝 흘려대면 소리도 없이 일어나 더듬거리며 안경을 쓰고 달래주는 사람이 너무 다정해서 였다. 며칠째 영하로 내려간 기온 때문에 얼어붙은 밖을 가디건만 입고 다급하게 나가서. 전날 밤에 출장 때문에 8시간 넘게 이동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돌아오면 제 다리부터 조물조물 주물러줘서. 자주 잊어버리는 약을 제때 물과 함께 챙겨 먹으라 건네 줘서. 코트 한 장 더 덮어줘서. 겨울에 손을 꽉 잡아줘서.

 

   얼마나 다정하던지, 자신이 이리 어리광쟁이에 엄살을 피우는 건 모두 키요코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당연히 쇼요는 잘못이 없었다.

 

   “…….”

 

   발바닥이 퉁퉁 부어 저릿하고 걷는데 발가락이 아팠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온 몸에 추라도 매단 듯 무거웠다. 시미즈 가의 주치의는 나이도 어린데다 첫 임신, 그것도 남성 오메가라 더 위험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임신중독증을 조심해야 한다고 그 깐깐한 얼굴로 경고를 해대니 제 알파도 무서운 듯 제 손만 꼭 잡아 걱정하지 말라 자신이 도닥여 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임신중독증이 뭐지? 임신에 중독되는 거…?

 

   허,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생각이구나. 육아 책이 있기는 하지만 하도 두꺼워 매사 첫 장만 펼치면 꾸벅꾸벅 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신 키요코가 읽으니까 괜찮아. 괜히 찔리는 양심을 다독여 봤다. 아무튼 발은 저리고 몸은 축축 늘어지니 움직이기도 싫었지만 배가 고팠다. 도우미 분이 해주시고 간 계란 요리가 냉장고에 그대로 들어있었지만 생각만 해도 계란 비린내가 올라오는 느낌이어서 고개를 휘휘 저었다.

 

   “…키요코 상 회사 앞에 있던 브런치 가게에서 나오는 팬케이크 맛있었는데….”

 

   포실포실하고 생크림이 담뿍 얹어진 아주 두꺼운 팬케이크 말이다. 과일도 챱챱 썰어 야무지게 올리고, 따듯한 수란도 두개나 나오고, 사이드로 커피가 나왔다. 카페인은 마실 수는 없지만 아마 우유로 바꿔 달라고 하면 바꿔 줄 것이다. 아니면 직접 갈은 오렌지 주스도 있었던 기억이 흐릿하게 나니 그것도 좋았다. 아주 약간 동실하게 올라온 배를 쓰다듬었다. 아, 거기 죽도 맛있었는데.

 

   “아, 맛있겠다.”

 

   쇼요는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머리가 핑 돌아가 한참을 바닥에서 낑낑거렸지만 이내 드레스룸으로 기듯이 걸어갔다. 시간은 어느새 점심시간이 살짝 넘어가고 있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도우미나 비서, 혹은 자신에게 전화라고 매일 신신당부를 하던 키요코에게 전화를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제 새벽에도 편의점에 푸딩을 사러 갔었다. 그녀의 비서나 도우미에게 연락을 하면 당연하게도 그녀에게 소식이 들어갈 테니까, 절대 안 된다. 도움은 못 돼 줄망정 신경을 쓰이게 할 수는 없다고. 낑낑거리면서 양말을 두 겹이나 신었다. 어제만 해도 날이 그렇게 추웠는데 오늘은 나름 영상이었다. 춥기는 매한가지지만.

 

   음, 영상 2도도 영상이긴 영상이지. 택시를 타고 가면 금방이야. 택시 타고 가서 몰래 먹고 와야지. 회사 근처라서 키요코 상을 마주치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해야지. 그리고 잔뜩 뽀뽀를 하면 화를 내지도 못할 거야. 제 알파가 자기에게 얼마나 약한지 잘 알고 있는 약은 오메가는 낄낄거리며 내복을 입고 그 위에 옷을 또 걸쳤다.

 

   세상에, 거울을 보니 얼굴이 잔뜩 붓기까지 해 동실하기 그지없다. 쇼요는 근래 인생 최대 몸무게를 하루하루 찍고 있는 중이었다.

 

   몸무게가 느는 것은 별로 개의치 아니하지만, 몸무게가 느니 몸이 너무 무거워져 뼈가 다 아렸다. 그래도 한 번 먹으러 가기로 결심을 하자 가지 않는다는 옵션은 아예 지워져서 모자까지 야무지게 썼다.

 

좋아, 빨리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씻으면 키요코도 걱정하지 않을 거야. 현관문은 안쪽에서도 비밀번호를 눌러야 했다. 삑, 삐빅, 삑, 먹고 싶은 걸 먹으러 갈 생각에 마음이 붕붕 뜨니 눌리는 기계음도 왠지 노래처럼 신나게 들렸다.

 

   “아.”

 

   쇼요는 신나서 문을 열다가 딱딱하게 굳어 발걸음이 허공에 멈췄다. 1004호와 마주보는 1002호에 사는 이웃과 아직 호수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이웃의 부인 둘이 막 맞은편에서 외출준비를 하며 나왔기 때문이다.

 

   저건 정말 기이한 적의였다. 쇼요가 그간 환하게 건넨 인사에는 떨떠름하게 대답한다. 그렇다고 싫다고 대놓고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쇼요의 이웃들의 악의는 그들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시작해 피워 올랐다. 손으로 숨긴 입꼬리는 확실한 악의를 가지고 있었고, 눈가에는 붉은 기운이 넘실거려 시선이 따가웠다.

 

   쇼요가 아무리 먼저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해도 이유 모를 그 적의가 지속되니 앞에만 가면 저절로 어깨가 접혔고 허리가 꼬부라졌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 그러는데 애초에 웃는 얼굴 만드는 것도 힘들다고.

 

   우아한 코트를 걸친 두 부인도 쇼요를 발견한 건지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더 답답한 건, 도대체 왜 저런 눈길을 받아야 하는 건지 쇼요는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다. 그렇다고 왜 나한테 이러느냐 멱살 잡고 싸울 수는 없으니까, 앞으로 계속 얼굴을 마주봐야 할 이웃이니까. 쇼요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외출하시나 봐요.”

   “아…, 네.”

 

   후우, 한숨이 나오는 걸 억지로 삼키니까 가슴이 답답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두 부인은 이내 쇼요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갔다. 솔직한 말로는 뭔가 자신이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면 고치려고 노력이나 해봤을 텐데. 저 미묘한 얼굴과 기묘한 적대감은 쇼요의 마음만 술렁이게 했다.

 

   멍청이같이 그래도 이 상황에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어딜 봐도 상황을 악화시키는 짓이라 입술을 꾹 깨물고 조작조작 두 부인들 뒤로 한발자국 떨어져 섰다. 그저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그리고 소심한 반항이었다.

 

   소근소근,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도 흘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쇼요가 초조하게 곱게 모은 손가락을 빙글빙글 만졌다. 열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소근거리던 두 부인이 슬쩍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어디 가나 봐요.”

    “…아.”

   하도 똘똘 말아 댔나. 덥고 답답해서 숨을 헐떡거리던 쇼요가 뒤늦게 대답을 하니 곧 비웃음이 돌아왔다. 쇼요는 살짝 어지러워졌다.

   “아, 그, 네…. 점심 먹으러 잠깐….”

   “어머. 부인분은 일을 하러 가셨고요?”

   “…아, 키요코 상, 아니, 네…. 많이 바빠서.”

 

   부인이라는 말에 쇼요가 한참 뒤에나 알아차리고 우물거리며 대답을 했다. 제3의 성이 있는 사라진 이후라 자신에게 ‘남편’자가 붙는 건 너무 당연했다. 다만 그 1% 미만의 알파무리에게 둘러싸여 자란 쇼요는 키요코에게 ‘부인’이라고 호칭을 붙이거나 자신에게 ‘남편’이라는 호칭이 붙는 것이 어색했다. 쇼요는 키요코의 오메가였고, 키요코는 쇼요의 알파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쇼요는 키요코가 바빠 자신을 내내 따라다녀주지 못하는 것을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었다. 곧 휴가를 낸다고 했으니, 저 사람들에게 내 알파가 나를 버려 둘 정도로 매정하지 않다는 걸 강조하고 싶었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왜 이러지. 산소가 부족해 머릿속이 안개라도 낀 듯 답답했다. 맞은편에 사는 부인이 요란하게 호들갑을 떨었다.

 

   “아, 부인 분은 힘들게 일을 하시는구나!”

 

   옆에 서 있던 다른 부인이 맞장구를 쳤다.

 

   “어머, 어쩐지. 근데 임신하셨는데 맨날 밤에 뭐 사러 나가시던데…. 요즘 세상이 험해서 큰일이야.”

 

   그래, 밤중에 넘어지면 얼마나 위험한데. 거기다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손가락 하나도 까닥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하는 게 나을 텐데.

   중간부터는 하도 웅얼거리는 것처럼 들려 쇼요는 약간 들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은 대답도 하지 않는 자신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엘리베이터가 너무 답답한 나머지 대충 인사하며 문이 열리자마자 뛰쳐나갔다. 아니, 뛰쳐나가려고 했다. 문이 열린 로비 앞에는 모임이라도 가는 듯 아파트에 사는 부인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좋은 옷, 좋은 코트,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모임인데도 세련되고 맵시 있게 차려 입은 아주 원숙하고 우아한 부인들이었다.

 

   쇼요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는데 뒤에서 같이 걸어 나오던 부인들 때문에 앞으로 살짝 밀렸다. 세상에. 어서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서 좀 시원한 공기라도 마시면 좀 나을 것 같은데 열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만 있으니 감히 발을 옮긴 짬도 되지 않았다.

 

   “아, 저기.”

   “이게 누구야. 1004호의 신혼부부 아니세요? 어머, 정말 반가워요.”

 

   화려한 하얀 모피코트를 입고 있던 부인이 팔짱을 끼고 쳐다보다가 활짝 웃으며 갑작스레 다가왔다. 훅, 얼굴위로 끼치는 강한 플로라 향수에 헛구역질이 올라와 쇼요는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언제나 부인분만 출근하시는 거 봤거든요. 시미즈 씨는 일을 가시지 않는 것 같아서 얼굴 뵌 지 하도 오래 됐네요.”

   “아니 임신하셨다고 하는데…. 혹시 부인분이 밤에 혹시 혼자 나가서 먹을 거 사러 가시던데…, 혹시 알고 계세요?”

  

   옆에 커다란 진주알 반지를 낀 사람도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쇼요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다 고개만 꾸덕꾸덕 끄덕였다. 물론 키요코가 자신을 위해 밤에 먹을 걸 사가는 걸 알고 있다는 긍정의 표시였다. 아니, 자기는 그저 있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을 뿐인데…. 우아한 부인들의 눈이 부리부리 올라갔다. 힉!

 

   마치 퇴로를 막은 듯 쇼요 뒤에 서있던 요시다 부인이 참지 못하고 쏘아 붙이기 시작했다.

 

   “아니, 알고 있었다고요? 하, 참. 지금 임신한 부인을 일 시키고, 자기는 집에서 노는 게 잘했다는 말인가요? 하다못해 그랬으면 임신한 사람이 먹고 싶다는 걸 대신 사러 가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네? 아니, 저….”

   “그렇게 살면 아주 배우자에게 달라붙어서 등골만 쪽쪽 빨아먹는 빈대들이랑 도대체 뭐가 다른가요?”

   “아니, 그게, 키요코, 아니 그러니까, 시미즈 씨가 임,”

   “부끄럽지는 않으세요? 댁이 임신을 안 해봐서 그러는데, 정말 일하면서 움직이는 거 하나하나 몸에 부담되고, 스트레스는 얼마나 안 좋은 줄 아세요? 아니, 남편이 됐고 능력이 부족하면 적어도 일을 갔다 온 와이프 수발이라도 들어줘야 할 거 아니에요.”

 

   맞는 말이다.

 

   “저번에 보니까 장을 보는데, 어머, 부인분이 짐을 다 드시더라구요. 아니, 정말 그게 사람이 할 짓인가요?”

   “나중에 무슨 원망을 받으려고…, 아니, 아마도 아직 어려서 그러실 수 있는데요, 아무리 철이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한쪽에서 불만이 터지자 마치 금이 간 둑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듯 그 금이 간 둑과 함께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적나라한 적의가 이제 실체를 가져서 쇼요를 마구 찔러 댔다. 두개나 양말을 껴입어서 그런가, 발에 땀이 나고 미끈거리는 게 왠지 차가웠다.

 

   “그렇다고 딱히 집안일도 안 하는 것 같고. 와이프한테 그러는 거 아니에요.”

 

   맞아. 임신하면 힘들고 괴로우니 배려해 줘야 했다. 그리고 쇼요는 그 배려를 받아야 했고. 겨우내 답답해하는 쇼요를 위해 키요코는 퇴근 후 밥을 먹고 나면 느긋하게 옥상의 온실로 자신을 데려갔다. 조성이 잘 되어있는 온실 안에는 시미즈 부부처럼 답답해서 올라온 사람들이 꼭 있었다. 인사는 잘만 해도 쇼요를 소파에 앉고 차를 타러 가면 따가운 시선이 곧잘 쏟아졌다. 알 수 없는 수근거림. 적의 가득한 시선. 비웃음.

 

   …왜?

 

   왜, 내가 왜. 내가 왜 잘못한 듯이 말해. 당신들 말처럼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되고, 몸도 아프고, 이렇게 밥도 잘 못 먹고 있어서 그냥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것뿐인데….

 

   “진짜 놀긴 푹 놀았나 봐요. 몇 주 사이에 아주 살이 너무 오른 거 아니에요? 와이프는 힘들어서 빠지는 것 같은데.”

   “흐….”

   “하?”

   톡 쏘아붙이는 말이 툭 멈췄다.

   그 어려 보이는 시미즈 씨가, 오늘은 웬 옷을 그렇게 감싼 것인지 동실해 보이기까지 하는 소년 같은 남자가 갑자기 뚝뚝 눈물을 흘려 대니 비난을 하다가도 말이 턱 막히는 거다. 주르륵, 흐르는 게 아니라 서럽게 방울이 져서 뚝뚝 흘려 대니 유난히도 어려 보여서.

   아니 왜 우는 건데, 라고 말하기에도 그동안, 아니 지금만 하더라도 마구 얼러 댔으니 면이 있어 물어 보지도 못하겠다.

   참나…, 아니 갑자기 왜 울어? 우리만 나쁜 사람 만드네.

   싸늘한 침묵속에서 3층의 나카무라 부인이 우물거리며 변명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으으….”

   맨날 토하는 건 난데…,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키요코가 나를 위해 밤 늦게 나가는 것도 알아. 나도 피곤한 사람을 깨워서 내보내고 싶지 않아…. 그래도 속이 울렁거린단 말이야. 조금만 걸어도 발이 아프단 말이야. 왜 내가 잘못했다고 말을 하는 거예요. 왜 나를 싫어해요.

 

   눈물로 잔뜩 번진 시야 안에 잔뜩 굳은 표정의 사람들이 너울거렸다. 반짝이는 그녀들의 귀걸이와 붉게 칠한 입술만 잔뜩 번쩍거렸다. 잔뜩 자신을 사랑해주는, 그 달콤한 말을 해주는 입술과 달랐다. 날이 잔뜩 선 가시 같았다.

   “아.”

   쿵, 쇼요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뒤에 서있던 두 부인이 새된 비명소리를 지르며 놀라 쇼요와 같이 뒷걸음질을 쳤다.

   엉덩이가 아팠다. 놀라서 가슴이 펄떡펄떡 뛰었고, 눈물도 줄줄 흐르고, 엉덩이까지 시큰하다니, 그 와중에 바보처럼 배가 고프니 서럽기 그지없다. 배도 아픈 것 같았다. 이제 핫케이크도 뭐도 먹고 싶지 않았다. 그냥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제 알파의 페로몬이 그득한 그 안락하고 따듯한 방으로 말이다. 바보처럼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돌아가서 빨리 세수하자. 울었다는 걸 알면 당신이 얼마나 슬퍼할 것이냐. 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 거다. 그래. 쇼요가 주춤거리며 찬 대리석 바닥을 짚었을 때다.

 

   “쇼요?”

   “…키, 흐윽, 요코?”

   고개를 번쩍, 들었더니 눈앞에 그리운 제 알파가 마법처럼 서있었다. 한쪽 어깨에는 아침에 가지고 나간 검은색의 숄더백을 메고 있었고, 다른 손에는 유명 베이커리의 로고가 찍힌 박스를 들고 로비를 통해 막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눈물로 잔뜩 젖은 뇌가 아무리 물렁해 졌다 해도 아침에 출근을 할 키요코가 왜 여기 있는지 의문을 모락모락 피워냈다. 자신이 아프거나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점심시간이 갓 넘긴 이 시간에 굳이 집까지 올 필요가 있었겠는가. 바보처럼 이 순간에도 쇼요는 키요코의 회사를 걱정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굳게 다문 입술이 살짝 벌려져 있는 것 빼고는 시미즈 씨의 표정은 놀랍도록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잠시 그 자리에서 빤히 쇼요를 바라보던 키요코가 제 오메가에게 걸어왔다. 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을 박차는 그 마찰음이 서늘했다. 날이 오늘은 잔뜩 풀렸으니 기온 탓이 아니다.

 

   “괜찮아?”

   하얀 손이 쇼요의 볼을 쓸었다. 짠 소금물에 절여져 잔뜩 일어난 볼이 따가울까, 오죽이나 안쓰러웠는지 아주 섬세한 손길이었다. 키요코는 메고 있던 숄더백과 베이커리를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두 손을 주저앉아 있던 쇼요의 겨드랑이 밑으로 쑥 넣었다. 힘을 주니 쇼요는 종이짝 마냥 달랑 들어올려졌다. 달달 무릎을 떠는 쇼요가 제대로 서있지 못하자 키요코는 이내 엉덩이를 받쳐 안아 올렸다.

   “허?”

   쇼요는 아무리 작아도 남자였다. 비록 키요코보다 주먹 한 개 정도는 작고, 그녀가 높은 구두를 신었을 때는 그 차이는 주먹 두 개로 벌어졌지만 기본적인 뼈대가 있는 남자란 소리다. 건장한 사람도 같은 성인을 저렇게 아기를 들어 올리듯 들기는 힘들 텐데 풍성한 근육이라고는 찾기 힘든 미인이 저리 쉽게 들어 올리니 믿기지가 않는 모양이다.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원래 달래주면 더 서러워지는 법. 어깨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기 시작하자 키요코가 허리를 쓰다듬다가 도닥거리길 반복했다.

 

   왜 그래? 왜 넘어져 있었어. 아파? 쇼요, 아파? 어디?

 

   엉엉 우는 쇼요의 발음은 잔뜩 뭉개지고 무너져 있었다. 어르며 달래는 목소리가 조근조근 자꾸 질문을 하니 대답을 한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키요코는 용케 대답하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위로 가는 버튼이 아니라 아래로 가는 버튼.

 

   “아파? 어디? 울지마…. 괜찮아, 내가 왔잖아…. 회사? 오늘 반차 냈어. 응…, 쇼요랑 저녁에 맛있는 거 먹으려 가려고. 아니, 괜찮아. 근데 아프다고? 어디? 응?”

 

   배가 아파?

 

   웅얼거리는 말소리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키요코는 용케 그 발음에서 배가 아프다고 하는 아주 작은 소리를 들어버렸고.

 

   지금이야 그 누가 신경을 쓰겠냐만은, 알파의 가장 중요한 욕구는 아쉽게도 번식이 아니다. 식욕도 아니었고, 수면욕도 아니었다. 알파의 제 일의 욕구는 제 오메가에 대한 소유욕이었다. 그러니까 오메가를 번식 개체라고 비꼬듯 부르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오메가로 번식을 하는 개체들은 오메가를 번식의 용도로 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쇼요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비비던 키요코가 몸을 틀어 뒤를 돌았다. 로비에 매달린 샹들리에에서 비춰지는 인공빛에 비춰진 오른쪽 안경알이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얼굴을 외우듯 나란히 모여 있던 부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제….”

 

   말 사이에 한숨과 함께 고요한 분노가 녹아 있었다.

 

   “제 오메가가 임신을 해서요.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받았는데, 이 추운 날 차가운 바닥에 이렇게 쓰러져 있다니.”

 

   데구르륵 굴러가는 눈동자가 방금 전까지 쇼요가 넘어져 있던 자리를 쓱 훑었다.

 

   “그리고 아무도 일으켜 주지 않았네요.”

 

   내 오메가가 이렇게 울고 있는데도.

   명백한 책망의 말이었다.

 

   띵, 엘리베이터 소음이 다시 경쾌하게 울렸다. 키요코는 쇼요를 안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매우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품 안에 들려 있는 가여운 제 쇼요가 혹시 흔들려서 놀라거나 아파할까 봐. 방금 전까지 입을 두 개씩 달고 다니는 것 같던 사람들은 입에 풀이라도 칠했나 보다. 애매한 눈동자만 허공을 배회한다. 기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반, 저 시미즈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하는 사람 반, 적절하게 섞여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버튼을 눌렀다. 주차를 하고 가까운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 가지고 오는 길에 이런 일이 생길 줄 미리 알았다면 빵이고 뭐고 당장 달려와 아파트부터 폭파시키는 건데. 꾸욱, 버튼을 누르는 하얀 손가락이 굽혀지지 않았다. 콰직, 금속으로 만들어진 엘리베이터 버튼에 금이 갔다.

 

   예쁜 입술이 예쁜 곡선으로 일그러졌다.

 

   “이렇게 친절한 이웃이 돼 주셔서 감사합니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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