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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ry Marriage

W.하늘(@HQ_himmel)

   “히나타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히나타의 고개가 돌아갔다. 거리가 제법 되는데도 여기까지 소리가 들리다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목청도 좋다. 히나타가 눈을 살짝 좁히고 가다란 선으로 보이는 것을 응시했다.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축지법 쓰는 도사마냥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든다. 길쭉한 다리를 휘적거리며 뛰는 모습은 흡사 메뚜기다. 저런 걸 펄쩍펄쩍이라고 하던가.

 

   히나타가 아는 사람들은 대개 키가 크지만 저렇게 큰 사람은 흔치 않다. 그가 재빠르게 선택지를 추려냈다. 햇살을 받으며 살랑살랑 흩어지는 은빛 머리칼에 얼추 예상은 했다마는. 해맑게 웃는 얼굴 위로 휘휘 흔드는 손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가까이 다가온 인영이 눈에 익어 눈을 좁히고 지켜보던 히나타도 그를 따라 웃었다.

 

   “히나타! 오랜만이야!”

   “리에프 왔어?”

 

   야마구치가 옷에 주름지면 안 된다고 제발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라며 몇 번이고 신신당부를 했던 터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정받은 가벼운 머리라. 까맣게 잊어먹은 히나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로 다른 대학이라 알음알음 소식만 들었지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는 건 오랜만이다. 고등학교 삼 년 내내 함께하던 사람과 뿔뿔이 흩어지고 처음이라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 마음을 가득 담아 손을 부여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어라? 히나타 그동안 많이 컸네?”

   “으응?”

   “아 구두 굽이 높구나. 어쩐지….”

 

   바짝 다가선 리에프가 히나라를 쭉 훑었다. 가슴께쯤 오던 머리가 어깨선에 닿는 걸 확인하더니 활짝 웃는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키 이야기다. 무례하긴 해도 그리운 추억이라 내버려두자 마음을 넓게 먹었더니 냅다 뒤통수를 후려친다. 어쩐지는 뭐야. 방금까지 헤어졌던 가족을 만난 양 흥분했던 마음이 푸시식 식었다. 이자식이. 매끈한 미간을 콱 구긴 채 발을 뒤로 살짝 뺐다. 리에프의 순진무구한 시선이 뒤로 빠지는 다리로 넘어갔다. 그래. 쟤는 저게 문제다. 막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주제에 악의가 없다는 거.

 

   아악! 싱글벙글 하던 얼굴이 와그작 구겨졌다. 히나타의 다리가 훅 날아와 정강이를 갈겼기 때문이다. 키 작은 놈한테 맞으니까 정신이 번쩍 들지? 히나타가 꼬숩다는 식으로 입매를 삐뚜름히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정강이를 부여잡고 한 발로 통통 제자리 뛰기를 하는 꼴이 우스꽝스럽다. 전에 장난치다 제 발에 제가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셀프 고통을 맛본 적이 있다. 꽤 아플 거다 요놈아. 경험자의 여유로움이었다.

 

   저라고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싶었던 게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눈높이가 맞아야 사진이 잘 나온다는 사진사의 말에 울며 겨자 먹기로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거다. 제가 신장은 작더라도 사실 날 수 있노라고. 배구가 아닌 영역에서 우길 수는 없었다.

 

   하얀 드레스에 맞춰 준비한 하얀 구두에 혹여 때라도 타진 않았는지 닦아내는 손길이 분주하다.

 

   “정강이는 너무하잖아!”

   “너무하긴 뭘 너무해. 야쿠 씨 부를까? 응?”

   “야쿠 선배도 오셨어?!”

 

   내지르는 협박에 긴 몸을 꾸역꾸역 눌러 접고 잘못했다 사과를 한다. 엉덩이를 냅다 후려갈기던 매서운 발길질을 아직까지 기억하나 보다. 그때도 나쁜 뜻은 일절 없이 선배의 콤플렉스를 잘만 건드려대더니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어째 변한 게 없다.

 

   “다른 분들은 먼저 식장에 들어가셨어. 너도 들어가 봐.”

   “응. 이따 봐.”

 

   두 사람만큼이나 오래간만에 보는 선배들이라. 리에프의 목소리에서 은근한 기대감이 엿보였다. 참, 히나타. 대기실을 나가다말고 부르는 소리에 푹신한 대기실 의자에 앉아 옷을 손보던 히나타가 머리를 쳐들었다. 툭툭. 리에프의 손가락이 히나타의 앞머리에 닿았다.

 

   이쪽저쪽으로 뻗치는 머리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가볍게 컬을 넣어 고정시켰다. 기껏 힘들게 멋을 낸 머리를 치는 손길에 히나타의 눈이 앙칼스레 변했다.

 

   “결혼 축하해.”

 

   입술을 말아 접으며 건네는 말에 히나타의 눈이 댕그래졌다. 그 리에프가 저렇게 부드럽게 축하 인사를 할 수 있다니. 상당히 성숙해진 모습에 히나타가 벙찐 얼굴을 했다. 잠시 꼼짝 않던 그가 서서히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이내 광대까지 불룩 솟도록 웃으며 눈을 곱게 접었다. 가느다랗게 드러나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몸도 마음도 쌀쌀해지기 쉬운 겨울의 어느 날. 세상에서 가장 기쁜 듯 온몸에서 충만한 행복이 뿜어져 나왔다.

 

   히나타 쇼요, 오늘 결혼합니다.

 

 

-

 

 

   결혼의 상대는 아카아시 케이지. 고등학교 1학년 여름합숙에서 처음 만난 강호교의 세터다. 전체적으로 단정한 느낌을 주던 생김새 때문에 그런가 아니면 선배인 보쿠토 씨한테 거침없이 딴지를 걸던 모습 때문에 그런가.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츠키시마를 따라가 자율연습에 끼기 전까지는 말이다.

 

   보쿠토 씨와 쿠로오 씨에게는 쌀쌀맞게 대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건 오래 봐온 사이의 친밀감이었다. 풀이 죽은 보쿠토 씨를 쿠로오 씨가 놀리는 걸 웃으며 보았던 것을 안다. 원래 성격이 자상한 사람인지 제 사람 챙기는 게 습관처럼 익숙했다. 상대 선수의 자세를 읽는 법이나 스파이크 시 호흡을 맞추는 법을 알려주고 연습 후 스포츠드링크를 챙겨주는 것까지. 처음 본, 그것도 다른 학교의 후배인 히나타까지도 제 후배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챙기는 모습은 그동안 오해했던 게 미안할 정도여서, 저도 더 곰살궂게 굴려고 했다.

 

   도쿄까지 올라와야 하는 합숙에서 만나는 게 전부였지만 아마 그때부터였을 터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옛말처럼 작은 감정들이 조금씩 제 마음을 적신 게.

 

   “히나타 수건 여기.”

   “감사합니다 아카아시 씨!”

 

   수건을 받아든 히나타의 얼굴이 붉다. 연습 직후라 다들 벌겋게 달아올랐으니 이상하게 보일 일도 아니다. 굳이 가릴 생각도 않고 아카아시를 빤히 쳐다봤다. 잠시 쉴 법도 한데 부지런히 대걸레를 집어 들고 땀이 묻은 바닥을 닦아내고 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잽싸게 대걸레 하나를 더 빼와 아카아시 곁에 섰다. 고맙다며 싱긋 웃는 얼굴에 낯이 뜨거워져 고개를 푹 숙였다.

 

   “어라? 치비쨩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빠, 빨갛긴 뭐가 빨개요!”

   “진짜네? 히나타 얼굴 엄청 빨개!”

   “운동을 했으니까 그렇지 바보야.”

 

   하여간 종잡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히나타가 필사적으로 감추려 하는 게 뭔지 안다는 투로 말하는 쿠로오에게 바락바락 성질을 냈다. 그랬더니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옆에서 기름을 들이붓는 리에프다. 그 선배에 그 후배. 방심할 수 없는 쿠로오와 너무 순수해서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리에프까지 환장의 콤비다.

 

   하아. 능글거리는 쿠로오와 뭐든 엮이면 소란스러운 보쿠토를 피해 멀찍이 앉아있던 츠키시마가 쩔쩔매는 히나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바보가 바보한테 바보래. 제가 생각해도 우스운지 피식 웃고는 아예 고개를 돌렸다. 안 보면 마음이라도 편하다는 식이다.

 

   “그러게. 왜 몰랐지. 히나타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 아아, 아니에요…!”

 

   축축한 이마 위에 손이 올라왔다. 뜨뜻하게 열이 올라오는 이마에 서늘한 듯한 손이 닿았다. 원래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더하면 미지근해져야 정상인데. 오히려 더 뜨거워지는 통에 히나타가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아카아시가 무안하지 않도록 정말 아프지 않다며 손사래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아프면 바로 말해. 연습도 중요하지만 건강관리가 우선이야.”

 

   다정하게 말하는 데에는 면역이 없다. 네에에- 말꼬리가 길게 늘어나는 만큼 히나타의 목도 늘게 늘어졌다.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눈알이 바닥에 붙었다. 번듯하게 드러난 하얀 목덜미가 느릿하게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히나타뿐이다.

 

   처음에는 강호교의 주전 세터를 맡고 있는 사람에 대한 작은 동경. 그 다음은 뭐든 배우고 싶다는 관심. 그 정착지가 저 사람을 더 알고 싶고 곁에 있고 싶다는 호감일 줄 모르고 시작한 감정이었다. 이렇게까지 좋아질 줄 몰랐지, 나는. 그러게 왜 자꾸 잘 해줘서…. 괜히 아카아시 탓을 하다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제 멋대로 좋아해놓고 그를 탓하는 건 양심상 못할 짓이다.

 

   핸드폰이 징징 울려대는 바람에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다 말고 수건을 목에 걸었다.

 

   아카아시 씨.

 

   액정에 뜬 다섯 글자에 손가락 끝이 움찔거렸다. 이내 손을 거둬내자 몇 번 울리던 전화가 끊어지더니 띠링띠링 알람이 울린다. 흘긋 곁눈질하듯 훔쳐보았다. 밝아진 화면에 라인이 왔다는 아이콘이 떠 다닌다. 평소의 히나타였다면 그의 연락이 기뻐 침대를 데굴데굴 굴러다녔을 거다. 침대에 벌러덩 누운 히나타가 한숨을 푹 쉬더니 문자를 확인했다.

 

    전화를 못 받는 거 같아서 문자 남겨

    요새 바쁜 거 같아서 걱정이야

    건강 잘 챙기면서 연습해

    씻느라 못 봤어요

    저는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뚝뚝하게 말을 끊어냈다. 괜스레 화면에 그의 이름이 보이면 신나게 답장을 할 것 같아 아예 엎어두었다.

 

   아카아시는 도쿄에 살고 무엇보다 제 학교의 선배도 아니다. 자주 만날 수도 없는데 연락이라도 꾸준히 오는 건 기쁜 일이지만 그만큼 속상하기도 해서 일부러 무시하는 일이 잦아졌다. 특히 이제 곧 그는 졸업을 한다. 합숙에서도 볼 수 없게 된다니 어쩐지 마음이 헛헛하다.

 

   그래서 그가 다짜고짜 미야기로 내려왔다며 문자를 했을 때 멍청하게 입을 벌렸다. 왜? 머릿속에 물음표가 둥둥 떠다녔다. 졸업식이며 대입으로 바쁠 시기에 왜 먼 미야기까지 왔지? 연락을 무시했던 게 기분이 나빴나? 온갖 추측을 하며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학교 앞으로 뛰어나갔다.

 

   “아카아시 씨…?”

   “히나타.”

   “여긴 어쩐 일이세요? 무슨 일 있어요? 내일 학교는요? 이 시간이면 못 올라갈 텐데 어쩌시려구요?”

 

   대답할 새도 주지 않고 쏟아내는 말에 아카아시가 가만히 웃었다.

 

   “하나씩 물어봐. 학교는 졸업반이라 괜찮아. 어차피 못 올라갈 거 알고 내려온 건데 하룻밤만 재워줄 수 있을까?”

   “그럼요. 당연하죠.”

   “고마워.”

 

   그리고…. 내가 오늘 미야기로 온 이유는 말이야…. 말끝을 흐리고 침을 꿀꺽 삼키는 데에 히나타도 덩달아 긴장이 되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입술 안쪽 연약한 살을 잇새로 씹으며 그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일자로 꾹 닫혔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진다.

 

   “너한테 고백을 하려고.”

   “네? 무슨 고백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다는 고백.”

 

   갑작스러운 말에 히나타가 숨을 죽였다. 저게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그 고백 맞지? 사고가 멈춘 듯한 와중에 아카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도쿄보다 미야기가 더 추운가. 아까까지만 해도 붉은 기가 돌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깔끔하게 자른 손톱 끝이 꾹 쥔 손등을 파고드는 게 보였다.

 

   “내가 졸업하더라도 계속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안심했었어. 그런데 요즘 연락이 안 되면서 깨달았어. 이 관계가 언제든 쉽게 끝날 수 있는 관계라는 걸.”

 

   조곤조곤 말을 마친 아카아시가 조심스럽게 히나타의 손을 쥐었다. 생긴 것도 아이 같은데 열이 많은 것도 똑 닮아 따끈따끈하다.

 

   히나타는 어쩐지 조금 색다른 후배였다. 제 학교에는 히나타만큼 작은 후배도 없거니와 또 그만큼 활발하게 곁을 따라다니지도 않는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쉽게 풀이 죽지도 않고. 언뜻 보면 보쿠토 씨와 비슷하지만 좀 더 눈치가 있었다. 슬슬 경계를 하던 저를 어느 순간부터 졸졸 뒤쫓는 게, 제가 사람 돌보는 일에 익숙하다는 걸 잘 아는 눈치였다. 눈치가 빠른 후배. 작은 체구를 가졌음에도 위로 올라가려는 향상심이 기특한 후배. 단순히 귀엽다는 감정이 차차 사랑스럽다는 감정으로 자리 잡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휴일에는 보쿠토에게서 연락이 오더라도 대충 넘기던 그가 답장을 할 정도니 말 다했다.

 

   그것만으로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최근 들어 히나타가 이상했다. 연습 중이라 받지 못하더라도 쉬는 시간만 되면 꼬박꼬박 답장을 넣던 애가 죄송하다는 문자만 달랑 보냈다. 전화를 하면 기본 한 시간 넘게 통화하다 잠자리에 들어가서야 끊었는데 애초에 받질 않으니 목소리 듣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합숙에서만 만나는 타교 선후배. 그런 어중간한 관계로는 안 된다. 결정을 내린 뒤 행동은 신속했고 아카아시는 히나타 앞에 있었다.

 

   “나랑 사귀자.”

 

   항상 똑바로 눈을 마주치던 아카아시가 시선을 피해 내리뜬 건 처음이었다. 거절할 줄 알았나. 신기한 광경에 히나타가 답을 못하고 있자 꽉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좋아요.”

 

   떨리는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탓에 목소리가 발발 떨리진 않을까. 턱에 힘을 주었다. 말이 목에 턱턱 걸려 그가 미처 듣지 못한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고개까지 끄덕였다. 침울하던 표정이 급격히 밝아지더니 활짝 웃는 모습에 저까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카아시와 사귀기 시작한 히나타는 대학까지 그가 다니는 학교로 진학을 했다. 워낙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히나타가 퍽도 고생을 했더란다. 그 후 연애만 5년이다. 졸업이 무슨 이벤트인지. 이번에는 히나타가 졸업을 앞둔 날이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하고 달달한 말을 속삭이기에 그저 웃어 넘겼다. 도저히 남부끄러워 못할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이라 그날도 그 일환이겠거니 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카아시가 히나타를 붙잡았다. 멀거니 고개를 들었더니 사귀자 고백하던 날과 흡사한 표정을 한 그가 서있었다. 답지 않게 주머니에 넣은 손을 꼼질꼼질. 꺼내는 손에는 우아하게 포장된 반지 케이스가 들려있었다.

 

   “쇼요 나랑 결혼해줄래? 행복하게 해줄게.”

 

   화려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담담해서 저게 프러포즈인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만 그가 이런 일로 장난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 진심이구나 여겼다. 놀란 눈을 한 히나타가 주춤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얇은 약지에 끼워지는 반지가 꼭 맞는다. 굳이 답을 하지 않아도 의미가 전해졌다.

 

* * *

 

 

   원래 결혼은 5월에 하는 거래.

 

   생명이 가득하고 봄꽃이 흐드러지게 만발하는 봄과 여름의 경계. 다들 괜히 5월의 신부라고 하는 게 아니라며 어머니가 걱정을 하셨다. 괜찮아요. 히나타가 씩 입매를 올리고 어머니의 손등을 토닥였다. 12월 31일. 연말에는 힘들다고 만류하던 걸 무시하고 한사코 어려운 날짜를 잡았다.

 

   새하얀 버진로드 양 옆에 눈꽃을 단 듯한 조팝나무 두 그루가 섰다. 온 세상에 눈이 내린 것처럼 식장 전체가 하얗게 빛났다. 한눈에 봐도 사랑이 흘러넘치는 공간이었다. 그 앞에 수두룩하게 서 있는 기다랗고 커다란 체구의 남자들과는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들 나름대로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의 하객으로서 차려입은 것이었다.

 

   “다이치 씨, 오랜만에 뵙네요.”

 

   하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식장 앞에 선 아카아시가 낯익은 모습에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전보다 더욱 부드러워진 인상의 다이치가 인자하게 웃으며 손을 마주잡았다. 그래 잘 지냈고?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말에 아카아시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스가와라 씨두요. 오랜만이에요.”

 

   다이치 옆에 스가와라가 나란히 섰다. 누구보다 상냥해 보이는 사람임에도 인사를 건네는 그의 표정이 썩 떨떠름하다. 아카아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스가와라가 다이치의 옆구리를 쿡 찍었다. 아…! 작게 내지른 비명에 몇몇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멀어져갔다.

 

   “우리 애 홀라당 꼬여내서 결혼하는 신랑 표정이 개운치가 않아 보이네. 무슨 일 있어?”

 

   뼈가 들어있는 말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도 우리 애, 우리 애. 품에 끼고 살 듯 해서 졸업 이후로도 만남을 이어왔다고 들었다. 눈치도 빠르고 제 것 지키는 일에 열중인 사람이라 참 성가시겠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입술을 호를 그리는데 눈은 시베리아의 냉기를 옮겨놓은 양 차다. 아카아시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히나타가 신뢰하는 선배고 여차할 때 조언을 구하는 사람이라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걸 멍충이처럼 넘어갈 생각은 없다. 응어리를 쌓아두는 성질이 되지 못해서 기어코 속에 담아둔 말을 뱉어냈다.

 

   “대기실에 못 들어가게 하셔서요. 조금 당황했습니다.”

 

   눈을 정면으로 부딪혔다. 내색하지 말자 했지만 은연중에 이를 갈 듯 분한 마음이 나온다. 스가와라의 눈이 빙글빙글 웃는다.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억누르고 있으나 너 마음이 어떤지 다 안다는 식으로 올라간 입꼬리가 얄밉다.

 

   곧 식장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나 보기 위해 대기실로 향했다. 그런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 츠키시마가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제 앞을 막아섰다. 다음에 하는 말에 어찌나 당황을 했던지.

 

   “스가와라 씨가 아카아시 씨는 못 들어가게 막으라고 하셔서요.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곤란하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이는데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선배 말을 잘 듣는 후배일 뿐인데 뭔 죄가 있다고. 히나타에게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전해달란 말을 하고 등을 돌려야 했다.

 

   그런 짓을 해놓고는 태평한 얼굴로 인사를 하러 온 모습에 기분이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다. 아카아시가 불쾌한 기색을 있는 대로 드러냈다. 그를 따라 스가와라의 눈에도 불길이 인다.

 

   히나타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건 기껏해야 1년이었지만 그간 제가 가르친 게 얼마인데. 감히 애지중지 키워온 내 자식을 너 같은 놈한테 넘겨줄 성 싶으냐.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마땅한 이유도 없이 아니꼬워 견딜 수가 없다.

 

   “히나타는 준비하느라 바쁠 테니까 배려해서 그런 건데 이렇게 나오면 내가 좀 서운하지.”

 

   1년이면 밥이 몇 끼인지. 끼니를 괜히 더 챙긴 게 아니었다. 스가와라가 금세 여유를 되찾고 식장에서 봐? 하며 아카아시의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갔다. 입가에 통쾌하다는 웃음이 걸렸다. 스가와라 씨는 천사일지도 모른다며 칭찬을 하던 히나타가 떠올랐다. 아니야 히나타. 저게 어딜 봐서 천사야. 소악마지.

 

   그 꼴을 잠자코 넘기자니 헛웃음이 난다.

 

    쇼요, 너와 내 사이엔 왜 이렇게 장애물이 많은 걸까. 하기야. 결혼 허락을 받을 때도 양가 부모님보다 더 유난이었던 사람이다. 이것저것 별 것도 아닌 일에 흠을 잡아 결혼을 꼭 해야겠느냐 되묻는 걸 들은 적 있다. 세상 부부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건 아니라는 둥 오히려 상대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는 둥. 이혼율을 들먹이며 어찌나 속살거리던지.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정도 심술은 약과일 정도다. 휴우. 긴 한숨을 내쉰 그가 점점 채워지는 식장을 바라봤다. 중간 과정이 어떠하든 저는 오늘 히나타와 결혼식을 올린다. 평생 바라던 사람을 얻는데 저런 건 넓은 마음으로 받아줄 수 있다. 좋게 좋게 여기자 하면서도 입맛이 썼다.

 

-

 

 

   하얀 길 끝에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아카아시가 서있다. 부모님이 허락하셨다지만 정식으로 혼인신고도 못하는 마당에 크게 벌릴 것도 없었다. 조촐하게 고등학교 시절 부원만 초대한 자리다.

 

   천천히 흐르는 반주에 맞춰 조심스레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겼다. 길게 늘어지는 옷자락을 밟고 넘어질 뻔한 게 서너 번이라 절로 신경이 쓰였다. 히나타가 움직일 때마다 면사포가 흔들려 대롱대롱 매달린 진주가 영롱하게 반짝였다. 두 손에 땀이 나도록 잡은 부케에서 향긋한 꽃내음이 폴폴 올라와 긴장을 풀어주었다.

 

   다소 딱딱하지만 다이치의 성격대로 성실한 주례가 이어졌다. 주례는 처음이라.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식장 안에 울렸다.

 

    “…평생 희로애락을 함께할 두 사람의 앞길에 축복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이크를 넘겨잡은 건 사회를 맡은 쿠로오다.

 

   “자 그럼! 결혼식의 꽃! 히나타 씨가 아카아시 씨를 위해 준비한 이벤트가 있다고 합니다!”

 

   사회를 맡은 쿠로오가 미리 준비한 대본을 읽으면 히죽히죽 웃었다.

 

   히나타가 준비한 이벤트라니. 저는 일찍이 그런 걸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의아한 눈이 되어 나란히 선 히나타에게 시선을 던지자 고개를 푹 숙인다. 그렇지 않아도 부끄럼을 타는 아이라 조금만 열이 올라도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드는데 오늘은 양쪽 뺨이 유난히 빨갛다. 어디 아픈 건가? 조명이 강해서 열이 올랐나?

 

   “히나타 괜찮아…?”

 

   소곤거리며 묻는 말에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 입술을 우물쭈물하는 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정작 먼저 꺼내지 않으니 영문을 모르겠다.

 

   “신부가 던진 부케를 받은 여성은 결혼 운을 받아간다고 하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이 자리에는 남성 분들이 더 많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다른 이벤트를 준비했습니다.”

 

   설마. 아카아시의 눈이 가로로 찢어졌다.

 

   “히나타 씨의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 웨딩가터가 있는데요. 아카아시 씨가! 입으로! 가터를 벗겨서 던져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히나타가 얼굴을 붉혔구나.

 

   아카아시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쿠로오를 바라봤다. 어설프게 드러난 한쪽 눈으로 내가 뭘? 이란 눈짓을 한다. 뻔뻔한 모습에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슬쩍 히나타를 보자 부끄럽긴 해도 놀란 것 같진 않다. 작은 일에도 어버버거리기 일쑤라. 당황하지 않는 걸 보니 미리 들은 말이 있나 보다. 저기 히나타, 싫으면 안 해도 돼. 이렇게 좋은 날 그의 기분이 상할까 목소리를 죽여 귓가에 속삭였다.

 

   “괘, 괜찮아요. 그, 저, 아카아시 씨랑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

   “응?”

   “보쿠토 씨랑 쿠로오 씨가 그랬거든요. 웨딩가터를 직접 빼줘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디구….”

 

   안 봐도 비디오다. 일을 계획한 건 쿠로오겠지.

 

   그의 예상대로 이건 대기실을 츠키시마가 지키던 것을 본 쿠로오의 머리에서 나온 장난질이었다. 등을 돌린 채 식장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 손뼉을 딱 쳤다. 아카아시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단 말이지…? 그건 즉 히나타가 쪼르르 달려가 상의할 시간이 없다는 거잖아. 입술을 죽 늘이고 웃었다. 이거 재밌겠는데?

 

   그 길로 뭣도 모르는 보쿠토를 끌어들였다. 아카아시가 놀라는 거 보고 싶지 않아? 하는 말에 머리를 바짝 세운 보쿠토가 목을 마구 끄덕였다. 항상 냉철하던 녀석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저만이 아니었다. 나중에 빠져나갈 때는 보쿠토를 제물로 삼을 생각이다.

 

   히나타에게 결혼 축하한다며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요새는 부케 던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웨딩가터 벗기기라는 게 있다며?”

 

   걸려들어라 던진 미끼를 히나타가 덥석 물었다. 그게 뭔데요? 순진하게 묻는 꼴에 선배로서 가슴이 뜨끔했으나 안쪽에 깊숙이 넣어두었다. 뭔 짓을 해도 무심하게 넘기는 후배를 놀릴 수 있는 기회가 그리 흔한 게 아니라. 마음을 다잡은 쿠로오가 히나타에게 바짝 다가가 속닥속닥 그게 뭐냐면…. 하고 설명을 하였다.

 

   “아카아시 씨 우리 행복하게 살아요!”

   “─굳이 안 해도 행복할 거야.”

   “우음…. 그래도요.”

 

   의지를 활활 불태우는 히나타에게 괜찮다며 위로를 했지만 연신 흘깃거리는 눈치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공연히 이상한 소리를 해가지고 제 사람을 고민하게 만들다니. 아카아시의 눈매가 절로 뾰족해진다. 쿠로오를 매섭게 노려보자 오야오야 그렇게 보지 말라며 보쿠토를 향해 턱짓을 한다. 보쿠토 탓이지 제 탓이 아니라는 제스쳐다.

 

   누가 모를 줄 알고. 저 양반이 이럴 머리가 있었으면 시험 점수를 그따위로 맞지는 않았다. 웨딩가터는 고사하고 가터가 뭔 줄이나 알까.

 

   “어서 해요! 그, 그래도 부끄러우니까 한 번에 끝내주세요!”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언제 봐도 예쁜 다갈색 눈동자가 비장하게 빛났다. 마음잡고 싸워본 적은 없다만. 두 사람의 관계에서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전적인지라. 이번에도 넘어가는 건 아카아시다.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사람이다. 바락바락 우겨서 이기면 뭐하나. 히나타한테 더 쩔쩔매는 건 제 쪽이라 도리어 이쪽 손해인데.

 

   결국 한숨을 내쉰 그가 히나타를 의자에 앉혔다.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어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지만 히나타가 좋다면 그걸로 됐다. 아무래도 드레스를 걷는 게 좋겠죠? 하며 드레스 자락을 잡는 손을 움켜쥐었다. 남자들끼리 살을 부대낄 수밖에 없는 선수생활이니 웃통을 벗어젖히는 일은 큰일도 아니다. 맨살을 보일 때마다 간섭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걸 알고 있기에 다른 때라면 그러려니 했겠지만 오늘은 쉬이 넘길 수 없었다. 그야 결혼식이니까. 오늘의 히나타는 온전히 제 것이어야 했다. 그를 만류한 아카아시가 손수 드레스 자락을 올리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힉!”

 

   안 그래도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 때문에 어색해 미칠 지경인데 허벅지에 훅 끼치는 숨결에는 아예 비명을 집어삼켰다. 아카아시가 제 드레스 아래에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홧홧해진다. 조금 창피한 걸 감수하면 평생 아카아시와 행복할 수 있으니 거저먹는 거 아니냐며 살살 구슬리는 쿠로오 때문에 냉큼 하겠다고 덤빈 게 바보 같다. 이렇게 낯이 뜨거울 일이라면 진즉에 거절했을 텐데.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

 

   히나타가 좀이 쑤신 것 마냥 몸을 배배 꼬는 사이 아카아시가 레이스와 리본을 대충 얽어놓은 웨딩가터를 찾아냈다. 급조해 만든 티가 역력하다. 이렇게 부끄러울 줄 모르고 하자고 했겠지. 언제까지나 저만 보고 싶은 얼굴이라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쿠로오의 장난질에 덥석 걸려들기나 하고 말이야. 그런 순진한 점이 히나타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지만,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해서 눈앞에 보이는 살결에 입을 맞췄다. 이내 이를 드러내 살덩이를 콱 물어버렸다.

 

   “으앗…!”

 

   놀란 눈이 댕그래졌다. 죄다 가려져 있으니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만 답답할 뿐이다.

 

   “─여기요.”

 

   끈을 빼내 물고 빠져나온 아카아시가 태연하게 쿠로오에게 끈을 건넸다. 연하게 바른 코랄색 립스틱이 묻어나는 하얀 레이스를 받아든 쿠로오가 멍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에 흥이 식었다. 외려 아카아시보다 히나타의 얼굴이 더 새빨갛게 변하니 저쪽을 건드리는 게 더 재밌겠다.

 

   “히나타, 아카아시가 안에서 뭐했어? 으응?”

 

   표적을 바꿨는지 몸을 돌려 히나타에게 살금살금 다가간 쿠로오가 입술을 귓가에 바짝 붙이고 물었다. 그 꼴을 지켜보는 아카아시가 단정한 눈매를 와그작 구겼다. 헌데 저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멀찍이 서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지켜보던 스가와라가 턱턱 걸어오더니 불쑥 쿠로오의 멱살을 잡는다.

 

   “우리 애한테 이상한 거 시키면 죽는다고 했지?”

 

   쿠로오의 멱살을 잡아챈 스가와라와 스가와라를 말리기 위해 붙어선 다이치, 멍청하게 서 있다 봉변을 당한 보쿠토까지. 세 학교가 엉키니 딱 개판 오 분 전이다. 저, 저기…. 선배들. 그…. 난장판이 된 결혼식장에서 상황을 수습하려는 듯 히나타가 이쪽저쪽 고개를 분주히 움직였다. 그를 가만 지켜보던 아카아시가 난장판 속에서 슬쩍 그의 옆에 섰다.

 

   “히나타.”

 

   허리를 낮추고 작게 속삭이는 말이.

 

   “이 다음은 밤에 하자.”

 

   흠칫 놀라 얼굴을 들자 입술을 말아 올린 아카아시가 보였다. 가늘게 접은 눈이 뭘 의미하는지 모를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다. 히나타의 하얀 피부 곳곳에 열꽃이 피었다.

아카아시 케이지 X 히나타 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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