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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iness

W.한림(@shoyo_right )

   올해로 결혼 10년 차, 육아 7년 차가 된 시라부 켄지로는 만능 살림꾼이다. 출근 시간이 배우자인 히나타 쇼요보다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기도 하고, 의외로 재능이 있어서 켄지로가 도맡아서 하고 있다. 기상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알람이 울리기 전 눈을 뜨는 것은 일도 아니다. 침대 옆 좁은 탁자 위에 있는 알람시계를 끄고, 일어나면 기지개를 켠다. 뭉친 근육을 상하좌우로 이완시키고 나면 쇼요가 깨지 않도록 뒤꿈치를 들어서 조심히 나간다. 앞치마를 두르면 아침 식사 준비가 시작된다. 아침 식사보다 아침잠이 더 필요하지만, 굳이 식사를 준비하는 이유는 하루에 저녁 식사 한 끼 같이 먹는 것이 아쉬워서다. 안 그래도 아침에는 입맛이 없는 쇼요와 히로를 위해 수프와 빵을 준비했다. 식탁 위에 접시 꾸미기까지 마치고나서야 곤히 잠든 쇼요를 깨운다. 지난 밤 재직 중인 학교 배구부의 친선경기로 늦게 귀가한 쇼요는 쉽게 눈을 뜨지 못 했다.

 

   “쇼요.”

 

   낮고 다정한 목소리에 작은 투정을 부리며, 반대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쇼요, 이러다 늦겠어. 다정한 목소리에 차마 짜증은 내지 못하고, 주인이 자리를 비운 베개 밑으로 머리를 숨겼다. 침대 밖에서 깨우다간 지각 확정이다. 하는 수 없이 침대에 한쪽 무릎을 대고 몸을 가까이 붙였다. 뽀얀 볼 위에 가볍게 쪽쪽거리자 눈을 반쯤 뜬다.

 

   “더 자고 싶어. 왜 오늘이 금요일이야?”

 

   목에 팔을 감은 쇼요가 칭얼거렸다. 누구나 아침마다 하는 생각. 왜 오늘이 주말이 아닐까. 안쓰러운 마음은 잠시. 아침밥을 포기하고 더 자고 싶어서 부리는 수작인 걸 잘 알기에, 목에 감은 팔이 풀리지 않도록 확인하고 그대로 어깨와 목을 받쳐서 일으켰다. 잠이 덜 깬 얼굴을 보다가 짧은 입맞춤을 하고 나간다.

 

   “세수만 하고 나와. 오늘은 스프랑 빵이야.”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냄비를 확인하고 불을 줄였다. 다음은 잠 많기로 유명한 시라부 히로 차례이다. 매일같이 전쟁을 해대는 지라 가기 전에 꼭 기합을 넣어야 한다. 신경 써서 꾸민 방은 히로의 손길 한 번이면 난장판이 된다. 바닥에 널린 알림장과 학습지를 주워 책상위에 올려놓고 침대로 다가갔다. 켄지로의 얼굴을 빼다 박은 히로를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었다.

 

   “히로, 아침 먹자.”

   “싫어요.”

 

   쇼요가 귀가할 때까지 잠을 안 자고 기다렸다. 평소 잠 드는 시간보다 세 시간은 더 늦게 잤으니 힘들 수 밖에. 잠을 방해하는 켄지로를 피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켄지로는 시간이 촉박해서, 이불 끝을 잡고 단숨에 걷어냈다. 몸이 서늘해지면서 서러워졌다. 더 자고 싶은데. 우는 소리를 내는 히로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아침 안 먹을래요.”

   “엄마랑 먹을 건데?”

 

   히로가 말을 안 들을 때는 만병통치약 쇼요 이름을 솔솔 뿌려 넣는다. 아침밥은 먹기 싫고, 엄마는 보고 싶은 히로는 아까보다 더 울상이 되었다. 엄마 이름만 안 들었어도 다시 누울 텐데. 버둥버둥 발을 밀어가며 짜증을 내던 히로는 큰 결심을 한 듯 양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힝, 그럼 안아주세요.”

 

   켄지로는 히로의 엉덩이를 단단히 받쳤다. 졸린 눈을 비비던 히로의 작은 손이 엄마를 발견하자 살랑살랑 흔들었다. 엄마! 말끔하게 씻고 나온 쇼요는 덜 마른 머리칼을 넘기며 웃는다. 두 사람 다 아침식사는 무리였는지 밥 한 숟갈 뜨기 전에 하품부터 했다. 너무 졸려. 입을 가리고 하품하는 쇼요와 히로는 눈이 마주치자 작은 소리로 키득거렸다.

 

   “엄마, 오늘도 늦게 오세요?”

 

   히로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렸다. 핸드폰 캘린더 어플에 히로 체육대회라고 표시되어있다. 그 밖에도 다른 일정이 있는지 메시지와 라인을 훑어봤다. 올해부터 배구부 고문을 맡게 되어 배구부 일정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어제 친선경기, 오늘은 별다른 것이 없다. 쇼요가 생각하는 동안 히로는 숟가락을 손에 꼭 쥔 채로 기다렸다.

 

   “아니. 오늘은 일찍 올게. 끝나고 마트에 장보러 갈까?”

   “예! 좋아요!”

 

   기분이 좋아진 히로는 쇼요의 얼굴을 반찬 삼아 빵 한 조각 먹고, 얼굴 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보니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식사를 마치고, 각자 먹은 식기는 식기세척기에 넣고 자리를 떴다. 거실 소파에 올려둔 가방을 챙겨들고 나가자 켄지로와 히로가 따라왔다. 마중 인사, 배웅 인사는 꼭 하는 건 이 가족의 약속이다. 유치원에서 공수인사를 배운 후로 히로 배에 손을 올린 채로 허리를 깊게 숙였다. 짙은 갈색 정수리가 예뻐서 가방을 다른 손으로 옮겨 들고 쓰다듬었다.

 

   “엄마, 잘 다녀오세요.”

   “쇼요, 잘 다녀와.”

   “켄지로, 히로 좋은 하루 보내. 저녁에 봐요.”

 

   켄지로가 쇼요를 품에 앉자 히로도 냉큼 허리에 매달렸다. 출근하는 모습을 더 보기 위해 부자는 창문에 매달렸다. 하얀색 승용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뒤를 돌았다. 등원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다. 히로를 욕실에 넣고, 켄지로는 히로의 방에서 오늘 입을 옷을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 다음은 칫솔에 치약을 쭈욱 짜서 입에 넣고 온 집안을 누볐다. 주방에서 가스레인지 밸브를 잠그고,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안방으로 가서 셔츠와 팬츠를 꺼내놓았다. 목 안 깊숙이 들어온 칫솔에 욕지기가 올라왔다.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 문을 두들기려는 찰나, 히로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아빠, 동생 갖고 싶어요.”

   “안 돼. 네 동생은 나한테 이혼 요구하는 걸로 안 끝날 거야.”

   켄지로와 히로의 관계는 너무 닮아서 불편한 부자? 라고 할 수 있다. 일곱 살 치고 말이 빠른 히로와 왕년에 입 좀 털었던 켄지로의 대결은 빠지면 안 되는 일과라고 할 수 있다. 히로와 있었던 일을 얘기하자면 일주일도 시간이 부족하다. 여섯 살이 된 히로는 어디에서 결혼이라는 걸 배워 와서는 쇼요와 결혼하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고, 아이가 제 아빠를 좋아한다는데, 이런 안일한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아빠는 짐 싸서 나가라는 말을 들은 켄지로는 약이 잔뜩 올랐다.

 

   「히로는 쇼요랑 결혼 못 해. 이미 내가 해버렸거든.」

   자신의 왼손 약지에 낀 반지를 자랑했다. 반지는 조명을 받아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흥. 팩 토라져서 티브이를 보는 쇼요의 무릎에 얼굴을 묻는다. 잉잉. 쇼요는 우는 소리를 내는 히로의 등을 쓸어주며, 눈을 흘겼다. 히로 울잖아, 미간을 찡그렸다. 거푸집으로 찍어낸 아들을 울렸다는 사실에 양심이 콕콕 찔릴쯤, 히로가 퍼뜩 몸을 일으켰다. 말간 웃음을 흘리는 것이 뭔가 좋은 생각이 난 듯 했다.

 

   「그럼 아빠가 나가면 되잖아. 가방 저기 있네.」

 

   히로는 손가락으로 캐리어를 가리켰다. 며칠 전 가족여행 다녀와서 미처 정리하지 못 한 가방이다. 어쭈. 결혼을 했으니 나가란다. 이혼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게 천만다행이다.

 

   「히로, 엄마는 아빠가 없으면 많이 슬퍼서 울 것 같은데.」

 

   아이를 여섯 살까지 키우다보면 몇 가지 몰랐던 재능에 눈을 뜨게 된다. 켄지로는 살림능력이고, 쇼요는 연기능력이다. 몇 초 지나지 않아서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하게 매달았다. 쇼요의 눈물에 히로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아래로 내려가는 입꼬리. 켄지로가 없으면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쇼요는 슬퍼서 운다고 한다. 갈팡질팡하던 히로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쇼요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엄마, 울지 마. 히로는 엄마가 울면 슬퍼.」

   「눈물 뚝 할 테니까. 아빠 꼭 안아주고 와.」

 

   이쯤에서 화해하고 끝날 줄 알았다. 결혼을 물어봤던 사람에게 헤어지는 방법도 물어본 히로는 켄지로의 다리에 매달렸다.

 

   「제발 우리 엄마랑 이혼해주세요! 네?」

 

   아들에게 이혼을 요구 당하는 아빠는 세상에 켄지로뿐이다.

 

*

 

 

   유치원 통학버스에 히로를 태워 보내고, 건물 1층 의원 문을 열었다. 오후 진료가 끝나고 한산해진 진료실. 온종일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를 등받이에 기댔다. 척추가 와드득하는 소리가 들리고, 지구 아래로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부터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위에 내려놓고, 눈썹 뼈와 콧대를 검지로 꾹꾹 눌렀다. 여간 피곤한 것이 아니라 이대로 엎어져서 십 분 아니 오 분이라도 단잠에 빠지고 싶었다. 핸드폰 액정이 불빛이 오던 잠을 쫓아버렸다. <히로 담임쌤> 이라는 이름을 보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켄지로는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 간절히 기도했다. 히로를 낳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가는 쇼요의 손을 잡고 기도한 후 두 번째다. 제발 사과할 일은 만들지 않았기를.

 

   - 안녕하세요. 히로 아버님 전화 맞으시죠? 다름이 아니라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혹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아, 네. 통화 가능합니다.”

 

   선생님은 차분한 목소리로 오늘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했다. 메모지에 들은 내용을 끄적거렸다.

 

   - 아버님이 히로랑 대화를 해보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켄지로는 이마부터 짚었다. 메모지에 끄적거린 것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또 무슨 일인고 하니.

 

-

 

   일곱 살 2학기를 지나고 있다. 유치원에서는 슬슬 초등학교에 입학할 준비를 했다. 자리를 원형으로 배치하던 것에서 두 줄로 바꾸고, 짝꿍도 뽑기를 통해 정했다. 금요일 하원하기 전 시간이 남아서 자리를 뽑았다. 짝이 되고 싶은 친구가 없는 히로는 하나 둘씩 이름이 채워지는 칠판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히로의 이름이 적힌 자리 옆에 다른 이름이 적혔다. 하필이면 같은 반에서 제일 못생긴 남자아이다. 여자 짝꿍도 아니고, 남자짝꿍.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히로는 옆에 앉는 아이와 칠판을 번갈아서 바라봤다. 하늘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이럴까.

 

   「너 비켜. 너랑 짝꿍하기 싫어.」

 

   히로는 책상을 5cm 가량 떼어냈다. 그쪽 방향으로는 고개를 두기 싫어서 왼쪽만 바라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로가 좋은 아이는 책상을 다시 붙였고, 성질이 난 히로는 아이의 어깨를 밀었다. 히로보다 덩치도 큰 아이는 쉽게 밀리고 않았고, 제 분에 못 이겨서 입을 열었다.

 

   「너랑 짝꿍 안 해! 나 혼자 앉을래.」

 

   교실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사람 면전에 대고 못생겼다는 말을 하니 밀어도 밀리지 않던 아이가 책상에 엎드려서 울기 시작했다.

 

   「아씨. 울지 말고 책상 비키라고. 왜 안 밀리냐고.」

 

   아무리 밀어도 책상이 꿈쩍도 않자 울고 싶어졌다. 지저분한 것이라면 질색을 하는 애가 교실바닥에 앉아서 울었다. 한 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끝을 본다.

 

   「히로, 친구한테 못된 말해서 미안하다고 해야지.」

   「그러면 싫은데 좋다고 거짓말해요?」

 

   눈을 깜박거리는 순진무구한 얼굴에 선생님은 뒷목을 잡고 넘어갈 뻔 했다. 히로의 반응이 격한 것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학기 초 아이가 히로의 어머니는 오메가니까 아빠라고 불러야 한다고 놀린 이후로 사이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럼 선생님도 히로처럼 싫은 친구한테 못되게 굴어도 되는 거야? 그럼 히로한테 그래도 돼?」

 

   융통성 있게 아이의 자리를 바꿔주기도, 화해를 시켜주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다. 히로에게 미안하지만 억지로라도 일주일은 앉혀놓아야 한다. 다른 아이들은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그러지 마세요, 라고 하는데 히로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선생님, 선생님은 히로 사랑하잖아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다.

 

   「히로는 여기에 앉기 싫은 거야? 그럼 선생님이 엄마한테 물어볼까?」

   「괜찮아요.」

 

   히로는 너무 싫어서 주먹을 꼭 쥐었다. 히로에게 켄지로가 지구라면, 쇼요는 우주다. 가장 크고 아름다운 우주. 망할 놈이 학기 초에 아이들이 모인 놀이터에서 너희 엄마는 오메가니까, 너는 엄마 없어. 라고 했다. 감히. 살은 뒤룩뒤룩 쪄서 받아쓰기도 십 점 맞는 주제에. 히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 아닌데. 엄마 맞는데.

   - 오메가는 아빠라고 불러야 해.

   - 우리엄마가 나 산부인과에서 낳았는데, 왜 아빠라고 불러? 너나 아빠라고 불러.

   - 오메가 주제에

   - 뭐라고? 이 돌대가리가.

 

   히로는 누군가 벗어놓은 운동화를 들어 냅다 얼굴을 후려쳤다. 징징 우는 아이에게 너 그러다가 고추 떨어진다고 잔뜩 겁을 주고 뒤돌았다. 그 후 히로의 손에 뭔가 쥐어져 있으면 무조건 도망갔다.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는데 짝꿍이라니. 히로는 진지하게 유치원을 자퇴해햐하나 고민했다.

 

-

 

 

   문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노란원복을 입은 히로가 터덜터덜 걸어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대충하고는 가방을 털썩, 상담용 소파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 위에 올라가서 대(大) 자로 뻗었다.

 

   “히로, 아빠한테 와. 안아줄게.”

   “아빠, 나 유치원 그만 다니고 싶어요.”

   “왜?”

 

   왜긴 왜겠어요. 선생님한테 얘기를 들었을 게 분명한데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친구랑 같이 앉는 게 유치원 그만두고 다니고 싶을 만큼 싫어?”

   “네. 싫어요.”

   “안 앉아보고 짝꿍을 바꿔달라고 할 순 없어. 월요일 하루만 앉아보고 싫으면 아빠한테 말해줘. 그럼 아빠가 엄마랑 상의한 다음에 선생님한테 얘기할게. 알았지?”

 

   목에 얼굴을 묻는 히로의 등을 쓰다듬었다. 낮고 다정한 목소리는 온종일 시달린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난 히로는 아까보다 기분이 나아졌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나아진 거지, 안 들키려고 숨기는 건지. 켄지로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시선을 내려 히로의 얼굴을 살폈다. 잔잔하고 고요한 얼굴.

   의원 앞에 세워진 승용차 조수석에 냉큼 올라탔다. 엄마! 운전석에 앉은 쇼요에게 얼굴을 부비고, 볼에 뽀뽀를 하느라 출발이 늦어졌다. 마트는 사람들로 붐볐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에 재료를 사려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다. 하나 남은 카트를 가져와서 여유 있게 밀었다. 식사담당인 켄지로의 뒤를 따랐다. 켄지로가 간단하게 도시락 재료를 챙기는 사이, 각자 관심이 있는 곳으로 흩어졌다. 히로는 과자코너에, 쇼요는 주류코너에 가 있다. 맘에 드는 초코과자 하나를 들고, 쇼요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매주 금요일마다 오는 마트인데다 쇼요바라기인 히로는 어디쯤에 있는지 바로 찾아냈다. 쇼요는 맥주를 두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4캔은 많고, 2캔을 사면 할인이 안 된다. 흐음. 내일은 체육대회가 있고, 또 술은 부족할쯤 끊어주는 재미가 있다. 고심 끝에 두 캔을 챙겨 뒤를 돌았다. 기다렸다는 듯 팔을 벌리고 있는 히로를 보자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렸다.

 

*

 

 

   집으로 온 쇼요는 씻으러 들어갔고, 켄지로는 가방과 외투를 내려놓고 장 본 것을 정리했다. 손을 씻고 나온 히로는 주방을 기웃거렸다. 켄지로와 함께 도시락을 준비하기로 한 히로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싫어서 냉장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마에 귀찮아, 하기 싫어 죽겠어,를 써 놓은 히로가 귀여워서 켄지로는 못 본 척 했다.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나온 쇼요가 히로를 부르자 자동으로 품에 안긴다.

 

   “히로, 뭐해?”

   “내일 아빠랑 도시락 같이 싸기로 해서 보고 있어요.”

   “아빠랑 히로가 만들면 정말 맛있겠다. 그렇지?”

 

   도시락 싸기 싫어서 시름시름 앓는 히로의 몸이 쇼요의 말 한마디에 쌩쌩해졌다. 햇볕 냄새가 나는 눈웃음에 히로는 홀려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암요. 엄마가 맛있겠다고 하는데 히로가 만들어야지요. 아들의 무한 충성모드에 켄지로와 쇼요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켄지로가 웃는 것은 얄밉지만 쇼요의 웃음이 좋아서 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다가 포기하고, 따뜻한 품에 더 세게 안겼다.

 

   너무 떨려서 잠이 안 온다고 해서 쇼요는 티브이를 끄고 히로와 함께 방에 들어갔다. 아이를 눕히고, 쇼요는 옆에 앉았다. 배앓이가 심해서 이불을 배까지 끌어올리고, 빠지지 않게 허리 밑에 이불을 넣었다. 말이 많지 않은 히로가 아기새처럼 재잘거렸다. 엄마, 달리기 나와요? 아빠랑 같이 하는 이인삼각도 할 거예요? 엄마가 나오는 건 정말 좋지만 다치면 어떡해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다친 상상이라도 했는지 급격하게 표정이 어두워진다.

 

   “엄마는 운동 잘해서 안 다쳐요.”

   “아.”

 

   히로는 빠르게 수긍했다. 지구이자 우주인 엄마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 배구 국가대표로 금메달을 따온 쇼요의 말은 그 무엇보다 신뢰도가 높다. 느리게 배를 토닥거렸다. 얼른 자야지. 자장가 박자를 맞추듯 느리게 가슴팍 위를 토닥였다. 듣기 좋은 목소리와 가슴팍에 닿는 적절한 무게에 점점 눈이 감겼다. 고롱고롱. 가슴이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조용히 빠져나왔다. 잘 준비를 마친 켄지로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온종일 끼고 있던 안경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켜진 무드등을 의지해서 침대에 올라왔다. 자연스럽게 팔을 벌려주는 품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켄지로는 쇼요의 어깨를 감싸 안고 도란도란 말했다. 아, 그 애. 쇼요는 조금 불편한 얼굴을 했다. 집에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얘기했을 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니까, 라고 생각하려 무던히도 애를 써도 불편한 감정이 사라지진 않았다. 어른인 쇼요도 불편한데 아이는 오죽할까.

 

   “어떻게 하기로 했어?”

   “월요일에 앉아보고 힘들면 얘기하기로 했어. 히로가 많이 기다리던 체육대회인데 엉망으로 만들면 안 되잖아.”

 

 

*

   히로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체육대회.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일찍 일어난 히로는 켄지로와 함께 열심히 도시락을 준비 했다. 손이 야무져서 준비는 예상시간보다 빨리 끝났다. 체육대회에 맞게 커플 트레이닝복을 입고 차에 올라탔다. 주말 오전이라 차는 막히지 않았다. 알림장에 공지된 유치원에서 대관한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 교문에는 체육대회를 알리는 현수막과 걸려있었고, 조회대에는 상장과 트로피, 상품, 풍선들로 꾸며져 있었다. 각자 짐을 한 개씩 들고 7살 반 천막에는 가족 단위로 앉을 수 있게 테이블과 의자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이르게 도착한 히로 가족은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았다.

 

   각 반 담임선생님이 인원을 확인하고, 식순이 적힌 종이를 나눠준 지 얼마 안 되어 원장선생님의 개회사와 함께 체육대회가 시작되었다. 유치원에서 5살, 6살, 7살 중에서 7살의 경기가 더 많다. 그중에서 운동신경과 체력은 쇼요를 닮은 히로는 모든 경기에 선수 이름을 올렸다. 그렇다보니 잠시 한눈을 팔면 경기가 끝나버려서 한시도 자리를 비우지 않고 사진을 찍었다. 마지막 경기는 체육대회에서 제일 인기 있는 가족미션달리기다. 이 경기는 상품이 큰데다가 가족이 함께 할 수 있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경기 규칙은 간단하다. 부모님 중 한 명이 반 바퀴를 돌아서 바구니에 담긴 종이를 뽑고, 종이에 적힌 미션을 하면서 아이의 손을 잡고 결승선을 먼저 도착하면 된다.

 

   지난해에 출전한 쇼요는 가족미션달리기에서 신기록을 세웠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운 기록이었다. 올해에는 켄지로와 함께 하기로 했다. 만약 1등을 하지 못한다면 히로에게 집에 가는 내내 지청구를 들을 수 있다. 신발까지 벗어던지고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며 의지를 다졌다. 준비하세요, 준비. 라는 말에 자세를 잡고 호루라기 소리를 기다렸다. 달리기는 출발이 중요하다. 호루라기가 불고 켄지로는 앞만 보고 달렸다. 종아리 근육이 당기고, 숨이 가빴다. 고등학생 시절 배구를 한 덕분에 중간지점에 일등으로 도착했다. 미션종이를 신중하게 잘 뽑아야하는데. 학부모들이 도착하고 있어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글자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비운 켄지로는 바구니에 손을 넣고 걸리는 종이 하나를 꺼냈다.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친 켄지로는 바로 쇼요를 찾았다.

 

   “히로, 쇼요 어디 있어?”

   “엄마는 왜 찾아?”

 

   주변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 것이다. 켄지로는 히로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많은 인파 속에서 쇼요를 찾았다. 왜 엄마를 찾는 걸까, 히로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켄지로의 손에 있는 종이를 뺏었다. 이리저리 켄지로가 이끄는 대로 걷는 히로의 눈에 글자가 정확하게 들어왔다. 아, 빠르게 수긍한 히로는 쇼요를 찾는데 동참했다. 목이 당길 만큼 큰소리로 불렀다. 엄마! 쇼요!

 

   많은 사람들로 켄지로와 히로가 가려지자 쇼요는 동영상 녹화를 중단했다. 핸드폰을 놓쳤다가는 고장날 것이 뻔해서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나온 쇼요의 앞에는 켄지로와 히로가 서 있었다. 어? 왜 안 갔어? 물어볼 새도 없이 손 하나씩을 차지했다. 그리고 무작정 손을 잡고 결승선이 있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여즉 안 달리고 있다가 자신을 발견하고 결승선으로 가자고 하는 것이 딱 눈치가 왔다. 쇼요는 켄지로와 히로의 손을 잡고 함께 달렸다. 결승선에 있던 선생님이 쇼요의 얼굴과 미션종이를 확인하고 1등 트로피를 건넸다. 쇼요의 기록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1등이다.

 

   “종이에 뭐라고 적혀 있었어?”

   “비밀.”


   모처럼만에 한마음이 된 부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히로가 꼭 쥐고 있는 종이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달리시오.] 라고 적혀있었다.

시라부 켄지로 X 히나타 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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