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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1주년의 미스테리

W.후보선수(@warmthebench110)

I

 

   쇼요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깨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아침은 유독 더 서늘하고 창백하다. 습관적으로 옆으로 파고들려 했지만 옆자리가 빈 지도 벌써 이틀째. 결국 빈 이불 위로 반 바퀴 구른 꼴이 되었다. 체온이 닿지 않은 자리라 볼에 닿은 이불이 차가웠다.

   그는 침대에 앉아 악몽을 더듬었다. 제삼자의 시점으로 진행된 꿈은 주인공의 남편이 사실은 살인마였고 선량한 시민을 연기하기 위해 주인공과 결혼했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은 철저히 배신당한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살인마로부터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억하기도 싫은 내용을 굳이 더듬어본 이유는 그 주인공과 남편이 쇼요가 쓰고 있는 추리소설의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쇼요는 그들이 나오는 꿈을 꿀 때면 꼼꼼히 되짚어 영감을 얻어야만 할 것 같은 사명감이 들곤 했다.

   다시 생각하니 또 무서워져 결국 고개를 흔들고 꿈을 잊기로 했다. 쇼요의 소설은 낡은 아파트에 이사한 사랑스러운 신혼부부가 주변의 일상적인 미스테리를 해결해주는 내용이니 살인마가 나오는 꿈은 무의식 저편으로 떠나보내도 직무유기가 아닐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쇼요는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언제나 행복한 결말을 안겨주고 싶어 하는 작가였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이다. 휴대폰 알람은 두 시간 뒤에 울릴 예정이었다. 쇼요는 다시 눕지 않고 서재에서 쓰던 소설을 이어 쓰기로 했다. 소설에서는 주인공 부부가 힘을 합쳐 윗집 할아버지 커플의 쌍방 오해를 바로잡고 해피엔딩을 맺을 예정이었기에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면 끔찍한 악몽은 잊을 수 있을 터였다.

   쇼요는 턱을 괴고 화면을 바라보다 결국 워드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휴대폰을 보니 고작 이십 분 지났을 뿐이다. 알람이 울리기까지는 한 시간 사십 분이 남았다. 악몽은 진작 잊혔지만 알콩달콩한 주인공 부부 이야기를 쓰다 보니 아까의 차가운 이불이 떠올라 기분이 영 헛헛했다. 쇼요는 주인공 부부에게 "미안해. 그래도 오늘은 좀 질투가 나서."라고 혼잣말하며 파일을 닫았다.

   쇼요는 「배구부의 추리소년」이라는 미스테리 소설로 데뷔했다. 그때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 배구부 생활이 몸에 익었을 때이고 지금은 결혼 1년 차에 신혼부부의 이야기를 쓰고 있으니 어쩐지 소설과 자신이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는 종종 나중에는 지겹도록 오래 살아도 하나도 지겨워하지 않는 노부부가 나오는 추리소설을 쓸 거라는 상상을 했다. 그때까지도 완벽한 해피엔딩을 그려나가는 작가이고 싶었다. 그가 쓰는 소설 속 연인과 부부는 모두 남성이다. 그와 그의 남편 다이치처럼. 어쩌면 쇼요는 자신의 해피엔딩을 꿈꾸며 글을 쓰는 중일지도 몰랐다.

   컴퓨터를 끄자 집안이 온전히 적막해졌다. 쇼요는 정적에 잠겨 옆 책상의 빈 의자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사실 그 의자의 주인인 다이치가 앉아있을 때에도 서재는 조용할 때가 많았다. 쇼요는 추리소설 작가, 다이치는 배구부 코치. 하는 일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서재에서는 함께 있더라도 각자의 일에 골몰해 말이 오갈 일이 많지 않았다.

   그래도 상대 팀의 경기 영상을 보며 귀에 꽂은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부터 하다 못해 뻑뻑해진 눈을 꾹 감았다 뜨는 버릇까지, 곁에 있을 때 다이치의 모든 행동은 소리 없는 것조차 소리가 되었다. 정확히는 쇼요의 속에서 나는 울림 같은 소리였다. 편안하고, 향긋하고, 보드랍고 따스한, 그리고 달콤한. 오감을 모두 갖춘 그 소리가 쇼요를 가득 메우곤 했다.

   지금의 적막은 무색 무미 무취의 공허이다. 쇼요는 의자의 바퀴를 굴리며 부러 소리를 내보았지만 공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휴대폰을 확인한다. 알람까지는 한 시간 이십 분. 이제 쇼요는 다이치의 빈 의자에 자리를 옮겨 의자를 빙글거리며 기나긴 시간을 때웠다.

   쇼요가 기다리는 알람은 다이치가 떠나는 날 아침 설정해둔 것이었다. 카라스노 고등학교 배구부의 코치를 하고 있는 그가 이제는 익숙한 연중행사가 된 도쿄 합숙을 떠나는 날이었다. 쇼요는 그때의 다이치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다이치는 짐 가방 옆에 쪼그리고 앉아 코치진용 합숙 일정표에 적힌 일정 시간을 확인하고는 쇼요의 휴대폰 알람을 맞춰놓았었다. 일정표를 가방 앞주머니에서 꺼내느라 그렇게 움츠린 자세가 나온 것이지만, 쇼요의 눈에는 그 모습이 견딜 수 없게 귀엽고 안쓰러웠다. 결국엔 그 넓은 등으로 달려들어 꽉 끌어안았던 것부터 허둥지둥 휴대폰을 뒤집어놓고 뒤돌아 쇼요를 마주 안아주던 다이치의 당황한 표정까지 기억에 선하다.

   다이치가 왜 그렇게 당황했는지는 그가 떠난 뒤 확인한 알람 메모로 알 수 있었다. 아침 시간대로 설정된 알람인 「잘 잤어요? 지금 전화할 수 있어요♥」와 저녁 시간대에 설정된 「오늘 일정 끝♥」에 수줍게 붙은 짙은 하트가 그를 부끄럽게 만든 것이었다. 다이치는 쇼요가 기대했던 것보다 애정 표현이 훨씬 거침없는 편이었지만 유독 글자로 남기는 표현은 쑥스러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이치는 마감 일정으로 바쁜 쇼요가 연락할 수 있는 시간을 잊지 말아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알람을 맞춰둔 것이지만 쇼요는 한참이고 집중하다가도 알람이 울리기 전이면 어김없이 휴대폰을 부여잡고 사랑스러운 메시지가 뜨는 순간을 두 눈으로 직접 맞이하고 싶어했다.

   쇼요는 알람이 울리자마자 다이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꾼 악몽 이야기를 하고 마감이 머지않았으니 좀 더 서둘러서 뒤늦게라도 도쿄에 가겠다는 말을 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이번 합숙은 쇼요도 함께 갈 예정이었다. 코치진들과도 아는 사이고 그동안 종종 카라스노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러 배구부를 찾은 때도 많았으니 별다른 이견은 없었다. 무엇보다도 합숙 마지막 날이 다이치와 쇼요의 결혼 1주년이라는 사실을 그들도 알았기에 도리어 함께 오라고 성화였다. 갑작스레 잡힌 마감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쇼요도 도쿄에 있었을 것이다.

 

   ― 어, 추리소년! 잘 잤어?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함께 코치로 일하고 있는 스가와라였다. 그는 쇼요가 데뷔한 이후로 종종 쇼요를 추리소년이라 부르곤 했다. 데뷔작인 「배구부의 추리소년」 속 주인공이 추리할 때를 제외하면 배구부 내의 사고뭉치라는 점이 그 이유인데, 후배를 향한 그만의 짓궂은 애정표현이었다.

   "선배, 다이치는요?"

   ― 어제 회식이 있었는데 타케다 선생님 옆자리에 앉았어.

   아하. 쇼요는 슬쩍 웃음 지었다. 고문 선생님은 술을 어찌나 맛있게 드시는지 곁에 앉은 사람까지 괜히 과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분이셨다.

   ― 네 알람이 매일같이 울려서 내가 오늘은 미리 꺼뒀어. 괜찮지?

   "제 알람이요?"

   ― 이거 네 알람 아니야? 쇼요에게 전화하기 하고 하트 다섯 개.

   스가와라가 지겹도록 봤다는 듯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쇼요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아마도 다이치가 직접 쓴 알람 메모 같았다. 아니라고 말하려던 그는 생각을 바꿔 다급히 아는 체를 했다. 다이치가 직접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가는 남은 합숙 내내 스가와라가 무슨 별명을 붙여줄지 모를 일이었다. 쇼요가 다소 어색하게 아아, 그거요, 하며 웃자 스가와라는 수화기 너머로 의심스럽다는 듯한 감탄사를 냈다. 쇼요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선배, 우리 애들은 잘 하고 있어요?"

   ― 응, 플라잉 실력과 달리기 능력이 출중해지고 있지.

   스가와라의 농담 속에 기특함이 담겨있다. 표현은 그래도 잘 하고 있다는 뜻이다. 쇼요는 밝은 소리로 웃었다. 그 뒤로 한참이고 배구부 이야기를 했다. 이쯤이면 하트 다섯 개는 잊었겠지 싶었는데 끊을 때쯤 스가와라가 말했다.

   ― 내가 하트 다섯 개 일어나면 전화 왔었다고 전해줄게. 슬슬 깨워야겠다.

   쇼요는 전화를 끊고 컴퓨터를 다시 켰다. 아무래도 스가와라는 알람 메모를 다이치가 직접 썼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다. 다이치의 남은 합숙 일정이 험난해질 듯하니 조금이라도 더 빨리 소설을 마무리 짓고 도쿄로 달려가야 할 것 같았다.

II

   잡지사 담당자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무슨 일이 있느냐 물어왔다. 쇼요는 가라앉은 말투를 끌어올리며 밤을 새서 피곤한 것뿐이라 답했다. 메일로 보낸 원고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전화를 끊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자 억지로 끌어올린 히나타의 표정이 다시 가라앉았다. 밤을 새웠다고 변명했지만 사실 원고는 어제 미리 끝낸 지 오래였다. 쇼요의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어제 저녁에 했던 다이치와의 통화 때문이었다. 잡지사에 미리 원고를 보내고 도쿄에 가겠다는 쇼요의 말에 오지 말라고 답했던 것이다. 저녁 늦게라도 미야기에 도착하니 근사한 저녁식사를 하자는 다이치의 말에도 기분은 풀어지지 않았다. 깜짝 선물 삼기 위해 전날 저녁이 되어서야 말했던 자신의 탓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못내 서운했다.

   그래도 오늘은 결혼 1주년이다. 오지 말라는 다이치의 말은 당연히 선의에 의한 것이었을 테니 마음을 풀고 재회를 준비하는 편이 좋겠다고 쇼요는 생각했다. 마지막 통화에서 다이치는 케이크와 와인을 사오겠다 했었다. 그러니 쇼요는 혼자 남은 사이 밀렸던 집안일을 해두고 간단한 먹거리를 사와 다이치를 맞이할 준비를 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작은 추리게임이 시작되었다.

   '시작'은 세탁소였다.

   쇼요가 오늘 세탁소를 찾게 된 건 필연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감이 있으면 집안일 사정은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세탁소에 옷을 맡겨둔 것도 다이치와의 조촐한 기념 파티에 양복을 입어볼까 싶어 옷장을 뒤적거리다 뒤늦게 생각난 것이다. 원래 찾아가기로 한 날보다 며칠을 밀렸다. 그는 부리나케 옷을 갈아입고 세탁소로 달려갔다.

   "옷 찾으러 왔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세탁소 주인은 쇼요가 들어오자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얼굴을 했다. 마치 지금 들어올 것을 예상한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든다.

   "역시 오늘 왔구만?"

   세탁소 주인은 서랍을 열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 쇼요의 손에 다짜고짜 쥐여주었다.

   "자, 나가서 열어봐. 옷은 다음에 찾아가도 되니까."

   쇼요는 봉투를 받아들고도 한참을 망설였다. 주인은 더는 볼 일이 없다는 듯 매정한 손길로 서랍을 닫고는 손을 세탁소 출입구 쪽으로 내저었다. 쇼요는 어쩔 수 없이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세탁소 문 앞에 서서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배구부의 추리소년은 이 음식을 좋아합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다이치의 글씨였다. 쇼요의 입가에 단박에 미소가 피었다. 스가와라가 붙여준 별명(‘배구부의 추리소년’)대로라면 카드의 답은 쇼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간장계란밥이었겠지만, 이 카드 속 음식은 분명 쇼유라멘이었다. 쇼요의 데뷔작인 「배구부의 추리소년」의 주인공이 쇼유라멘을 좋아한 이유는 그가 짝사랑하는 선배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쇼요도 쇼유라멘을 좋아하는 다이치를 짝사랑하고 있었다. 너무 적나라한 투영이어서 부끄럽다고 자주 생각하곤 했지만 다이치는 그 설정을 굉장히 좋아했다.

   쇼요는 다이치가 처음 「배구부의 추리소년」의 감상을 들려줬던 날을 기억한다. 그저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며 소설가로 데뷔한 후배를 축하하는 자리에서였다. 쏟아지는 격려와 호평 속에서 다이치는 히나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조금 아쉬웠다고.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 묻는 쇼요에게 다이치는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선배가 남 몰래 간장계란밥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오지 않았다'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조금 에두른 고백이었다. 말을 뱉은 다이치는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주인공이 쇼유라멘을 좋아하고, 그 이유가 자신이 좋아하는 선배가 좋아하는 음식이기 때문이라는 설정은 그저 우연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다이치의 긴장은 바로 뒤 그를 와락 끌어안아버린 쇼요로 인해 곧장 풀어졌다. 미스테리가 불러와 준 다이치와 쇼요의 시작이었다.

 

   다이치는 합숙을 떠나기 전 이 카드를 미리 준비했을 것이다. 그는 쇼요가 촉박한 원고를 할 때면 집안일을 완전히 잊어버린다는 점을 잘 알았기에 오늘, 즉 결혼 1주년 기념일이 되어서야 원고를 넘기고 세탁소의 옷을 찾을 생각을 할 것이라는 점을 정확히 예상했다. 미스테리로 시작된 그들의 시작을 미스테리로 기념하려는 것이다. 쇼요는 설레는 얼굴로 카드를 다시 읽었다. 행선지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연인이 된 이후 단골로 찾아가던 라멘 가게가 있었으니까.

   라멘 가게는 오픈형 주방이었다. 가게에 들어서는 쇼요와 눈이 마주친 주방장이 씨익 웃더니 쇼유 라멘 하나를 외쳤다.

   "아뇨, 저 먹으려고 온 건 아니고요."

   쇼요는 카드를 쥐고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불쑥 찾아와버렸는데 생각해보니 찾아온 이유를 말하기가 애매했다. 카드의 행선지라서 왔어요? 다이치가 맡겨둔 건 없나요? 쇼요가 말을 고르는 사이 카운터를 맡고 있는 주방장의 남편이 다가와 쇼요의 등을 밀어 자리에 앉혔다.

   "자, 일단 앉고 한 그릇 먹어. 계산은 미리 되어 있으니까. 점심 때잖아?"

   그러고 보니 벌써 한 시였다. 쇼요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자신의 추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만족스럽고 쇼요가 이곳에 점심식사 시간에 찾을 거라고 예측해 한 그릇을 주문해둔 다이치의 마음도 기뻤다.

   쇼요의 라멘은 주방의 아르바이트가 전해주었다. 수저 밑에 깔아두고 간 종이가 세탁소에서 받은 것과 동일한 하얀 봉투였다. 쇼요는 라멘은 제쳐둔 채 봉투부터 잡아 들었다. 뒤집어서 열어보려는데 여는 부분에 메시지가 있었다.

   「점심식사 후 볼 것. 체하지 않게 천천히 먹을 것.」

   그는 봉투를 다시 내려놓았다. 봉투로까지 잔소리를 하다니. 투덜거리듯이 중얼거리면서도 입가에는 연신 기분 좋은 미소가 맴돌았다. 이미 서운함은 잊은 지 오래였다. 이런 즐거움을 두고 도쿄에 가는 건 추리소설 작가로서도 사양하고 싶은 일이다. 쇼요는 천천히 그릇을 비우며 카드 속의 메시지가 무엇일지 이런저런 추리를 했다. 카드의 시작은 그들의 연인으로서의 시작인 「배구부의 추리소년」에 대한 내용이었으니 이번에는 연애 중에 있었던 사건이 키워드가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청혼과 관련된 장소일지도 몰라. 쇼요가 마지막 국물을 마시며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면 카라스노 고등학교 운동장인데. 가게를 나서며 쇼요가 내린 결론은 '다음 행선지는 운동장'이었다. 그는 설레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진짜로 다 먹었어?」

   "아이, 참. 당연하죠."

   쇼요는 혼잣말하며 카드를 뒤집었다.

   「3. 21.」

   그리고 한동안 서서 눈물을 참았다.

   그의 추리는 틀렸다. 카드의 메시지는 청혼이 아니라, 청혼 이후의 일을 말하고 있었다. 3월 21일은 쇼요의 집에 함께 찾아가 결혼하겠다는 말을 했던 날이었다. 많이 긴장했고,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져 한참이고 부둥켜안은 채 울었던 날이었다.

   쇼요는 카드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행선지는 자신의 부모님과 나츠가 사는 집. 그의 옛집이었다.

 

 

III

   다이치는 오늘 새벽 쇼요의 부모님이 사는 집의 대문을 소심하게 두드렸다. 미리 말씀드렸다지만 벨을 누르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아침이었다. 조심스러운 다이치의 손짓이 무색하게 대문이 벌컥 열렸다. 운동복을 입은 나츠였다.

   "나츠, 러닝 가려고?"

   "아뇨, 이미 다녀왔지요. 다이치가 온댔으니까. 오늘은 운 좋게 훈련도 쉬는 날이라서 나도 같이 있을 수 있어요."

   "어머님, 아버님은?"

   다이치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쇼요의 부모님이 현관으로 다가왔다. 그는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쇼요의 집에서 결혼식 1주년 파티를 하자는 생각은 쇼요가 합숙에 함께하지 못하게 된 이후 급하게 떠올린 계획이었다. 그가 기억하기로는 쇼요의 부모님은 여름마다 함께 여행을 가곤 했다. 그 일정이 겹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연락했는데 다행히 흔쾌한 어조로 허락해주셨던 것이다.

   "쇼요는 몇 시쯤 도착할 것 같니?"

   "아마 2시 정도일 것 같습니다. 좀 더 이를 수도 있지만…."

   자신 없이 말끝을 흐리는 다이치의 말을 나츠가 끊었다.

   "다이치가 예상한 오빠라면 정확하지!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일단 빨리 들어와요."

   나츠의 말에 다이치가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섰다. 1주년 파티가 시작되기까지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방문할 손님이 많으니 준비할 일도 많았다.

   쇼요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옛집을 올려다보았다. 그저 세탁소에 가려고 나왔던 터라 몰골이 엉망인데 부모님이 보시고는 아무렇게나 산다며 걱정하지 않을까, 다이치가 신경써주지 않는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메시지가 가리키는 행선지가 여기가 아니라면 뭐라고 하지. 그의 머릿속에 복잡한 생각이 스쳤다.

   그는 다시 카드를 부여잡았다. 꼬깃꼬깃해진 카드는 얇은 종잇장일 뿐이지만 포근했다. 달콤하고, 보드랍고, 향긋했다. 다이치가 남기는 공기처럼 그랬다.

   작년 3월 21일, 그들은 누가 반대하더라도 결혼식은 할 작정이었다. 이곳에 다이치의 손을 잡고 섰던 쇼요는 결과가 어떻든 오늘을 넘긴다면 평생 아무것도 무섭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잡은 손이 다이치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 잡았던 손처럼 쇼요는 카드를 쥔 채로 벨을 눌렀다.

   "오빠? 무슨 일이야?"

   인터폰의 화면에 나츠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물었다. 짐짓 걱정스러운 표정에 쇼요가 당황한 얼굴로 답했다.

   "아니, 그냥 지나가다가…."

   "엄마 아빠 여름 여행 가시잖아, 그거 준비하느라 좀 바쁜데. 급한 일이야?"

   쇼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지금이라고?"

   "오빠 진짜 너무한다. 따로 산다고 마음까지 멀어지기야?"

   쇼요는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아냐, 내가 요즘 정신이 너무 없었네. 죄송해서 어쩌지. 많이 바쁘셔?"

   "미안하면 짐 싸는 거나 도우래."

   나츠가 냉정한 어조로 말하고는 대문을 열었다. 쇼요는 죄인이 된 기분으로 마당에 뛰어들어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죄송하다고 외치는 쇼요의 말이 파티용 폭죽 소리에 묻혔다. 쇼요의 주황색 머리카락에 형형색색의 얇은 종이가 내려앉는다. 그는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다. 깔깔거리는 나츠의 웃음 뒤로 "우리는 괜히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는 부모님의 말이 들려왔다.

   "나 제대로 찾아온 거 맞죠?"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와 쇼요의 뒷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그래도 그렇지 몰골이 그게 뭐니?"

   "아니, 나는 그냥 집 앞에 나가려던 건데…."

   꼬깃해진 카드를 보여주며 불평하면서도 쇼요는 연신 웃고 있었다. 눈길은 부모님이나 나츠가 아닌 집안 곳곳을 향했다. 나츠가 서운하다는 듯이 시야를 막았다.

   "오빠를 놀리는 동생은 비켜주세요."

   "최종 목적지에 약간의 긴장감은 있어야지. 추리소설가가 그것도 몰라?"

   나츠는 주머니에서 천을 꺼내 쇼요의 눈을 가렸다. 한참을 부스럭거리며 묶는 나츠에게 쇼요가 물었다.

   "이것도 긴장감의 일부야?"

   귓가에 다정한 속삭임이 답했다.

   "기대감의 일부입니다. 하트 다섯 개."

   마지막으로 붙은 말은 농담조였다. 아무래도 스가와라가 새로운 별명을 단단히 굳혀놓은 모양이다. 쇼요는 하트 다섯 개란 말에 웃다가 천 아래로 눈물을 찔끔 흘렸다. 단 며칠이지만 평생을 잃은 것처럼 커다란 빈자리를 남겼던, 기다려온 목소리였다. 어둠을 더듬어 와락 끌어안으려는 쇼요를 다이치가 붙잡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쇼요는 순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치의 손길을 따라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오랜 시간 살았던 집이니 이 걸음이 부엌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걸음마다 마음이 설레왔다. 다이치는 케이크와 와인을 준비하겠다 말했으니 준비된 건 정말로 그 정도일 것이다. 사실 그냥 빈 식탁이 있어도 쇼요는 행복할 것이다. 첫 카드를 받은 시점부터 이미 행복했다.

 

   "셋, 둘, 하나!"

   나츠의 힘찬 카운트다운에 맞춰 다이치가 천을 풀었다.

   눈앞에 식탁이 있었다. 단지 식탁만이 아니었다. 다이치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둘러 앉아 그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식탁 중앙에는 케이크가, 케이크 위에는 기다란 초 하나가 꽂혀 있었다.

 

   쇼요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쇼요의 가족과 다이치의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건 결혼식 이후로 오늘이 처음이었다. 모두가 완전히 동의하고 기뻐했던 결혼은 아니었기에 다시는 모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주저앉은 쇼요를 향해 다이치의 어머니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쇼요는 그 손을 잡고 일어난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이치가 꾸려놓은 세계를 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추리소설의 해피엔딩이었다.

사와무라 다이치 X 히나타 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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